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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4) 부총리 집무실을 비대위 사무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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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97년 12월 23일 국회 국민회의 총재실, 임창열 부총리(왼쪽)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며 위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7.5%가 빠진 366.36으로 마감됐다. 원화 가치도 달러당 1995원으로 사상 최저치였다. [중앙포토]

1998년 1월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한국투자신탁 건물 15층.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의 여의도 집무실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임 부총리의 여의도 집무실을 비대위가 사실상 접수한 셈이다. 당시 임 부총리는 국회·청와대와 과천 청사를 오가느라 바빠 여의도 사무실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1월 중순, 외부 일을 보고 들어왔더니 사무실이 엉망진창이다. 직원들 표정도 부어 있다.

 “뭐야. 무슨 일 있었나.”

 “말도 마십시오, 단장님.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석준 과장이 소리를 낮추면서 다가왔다.

 “난리?”

 “임창열 부총리가 국회 일정이 있었는지 갑자기 여길 들르시더니 ‘왜 내 사무실을 말도 없이 없앴느냐’며 펄쩍 뛰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자기 사무실이 비대위 사무실로 바뀐 것을 여태 몰랐었나 봅니다.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던지고…. 아주 혼쭐이 났습니다.”

 “허, 그래?”

 “한국투신 변형 사장이 허겁지겁 뛰어오더라고요. ‘아이고, 부총리님’ 해 가면서 반대쪽에 사무실 금방 만들겠다고, 노여움 푸시라고…. 그래서 겨우 무마했습니다. 어쩌지요, 단장님. 누가 이랬느냐고 묻더니 단장님이 이렇게 했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이헌재 그 친구가…’ 하고는 나가는데, 찬바람이 쌩 불더라고요.”

 “허허,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해.”

 헛웃음이 났다. 임 부총리도 비대위가 자기 집무실을 차지한 걸 알긴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보고는 못 받았을 것이다. 자존심도 상하고, 입장도 있으니 그 사달이 났을 것이다. 예상했던 바다.

 비대위 사무실로 부총리 집무실을 선택한 건 나였다. 나는 그곳을 일종의 고지(高地)로 봤다. 공산주의자 레닌은 ‘커맨딩 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지휘소가 있는 고지)’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국가가 경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제권을 쥐는 행위’를 그렇게 표현했다. 비대위 초기에 내 머릿속을 꽉 채웠던 단어가 바로 그 ‘커맨딩 하이츠’였다. ‘비대위는 DJ 대통령 당선자의 들어오는 권력이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고지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상징이 부총리 집무실이었다. 평상시라면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것은 경제부총리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다. “지금은 비대위가 지휘를 맡아야 한다. 위기 극복의 큰 틀을 짜는 것도, 다음 정권의 경제 정책을 그리는 것도 비대위다.” 그러나 이런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다. 사령권을 쥔 자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내려다 본다. 집무실 하나만 장악하면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이다. 나는 그런 효과를 노렸다.

 사무실 배치도 그런 전략에 따랐다. 임 부총리의 집무실을 비대위 위원들이 차지하도록 했다. 임 부총리의 책상에는 내가 직접 ‘비대위원장’이라고 종이에 써서 명패를 붙여놓았다. 나머지 자리엔 소파와 회의 탁자를 넣어 위원들이 앉게끔 했다.

 비대위 기획단은 부총리 비서실에 터를 잡았다. 1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비서까지 8명이 서로 마주보며 책상을 붙여 앉았다. 칸막이도 없었다. 회의하는 소리, 전화하는 소리, 타자 치는 소리가 뒤엉켜 와글거렸다. 기자들까지 취재한다고 왔다갔다 하니 이런 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칸막이를 치지 않았다. 이곳은 일종의 ‘전시 상황실’이었다. 서로 나뉘어 앉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보가 한 곳에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시카고트리뷴 같은 해외 신문사의 편집국을 둘러보고 얻은 교훈이다.

 그러나 나가는 정부, 김영삼 정권의 재정경제원은 호락호락 통제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신경전이 치열했다. 집무실뿐 아니다. 외환 자료도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으려 했다. 당시는 외환위기의 정점이었다. 위기에 대처하려면 외화 자금과 대외 부채 통계 상황 파악은 필수였다. 그런데 통 자료를 넘겨주지 않았다. 자료를 쥔 건 재정경제원 외환자금과장 김석동이었다. 지금 금융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 김석동이다.

 “김 과장. 통계 좀 빨리 보내주게.”

 “아직 부총리가 자료 검토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검토하고 사인을 주셔야 외부 반출이 가능합니다.”

 “아니,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데, 언제 검토를 한단 말인가.”

 “오전에 국회 일정, 오후에 청와대 일정이 있으셔서…. 과천에는 저녁에나 오실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런 식이었다. 나는 한국은행 창구를 직접 장악해 외화 자금 통계를 챙겼다. 재경원에 기초 자료를 전달하는 게 한은이기 때문이다. 1월 중순이 되자 힘의 중심이 비대위로 본격적으로 넘어왔다. 그제야 재경원도 외화 통계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비대위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변양호 국제금융담당관과 김석동 외화자금과장이 그 과정에서 힘을 썼다. 우리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외환일보를 만들었다. 매일 이른 새벽 대통령 당선인 DJ를 깨우게 되는 바로 그 외환일보였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등장인물

▶임창열(67)

-경기고 동기. 재무부 관료로 성장해 97년 외환위기 직후 재정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된다. 이후 DJ 정권 내내 경기도지사를 지낸다. 현 알앤엘바이오 고문, 경기일보 대표이사 회장.

 
▶김석동(58)

-현 금융위원장.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에서 외화자금과장을 맡았다. 93년 금융실명제 대책반장, 95년 부동산실명단 총괄반장, 97년 금융개혁법안 대책반장 등을 지내 별명이 ‘대책반장’이다. 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 사태 수습 과정에서 줄곧 나와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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