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하는 자유로운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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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바람 뿐이다. 화면 속의 나무와 산은 다만 바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배경이다. 아니면 바람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대나무처럼 휘날리는 포무의 가지가 피를 토하며 쓸려 나갈 듯 몸을 추스리는 장면을 보라.

왼쪽의 화제(話題)마저 바람에 찢겨 나갈 듯 하다. 그러니 아무리 화면을 찢어지게 응시해도 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다만 바람이다. 화면 속 바람은 마치 빈 공간을 종횡하는 것 같다. 전기(田琦)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그러나 실제로 보이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산과 나무와 모옥(茅屋)이다. 바람은 없다. 그림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전경에서 시야를 압도하는 나무가 아닌가. 나무는 화면의 중심에서 우뚝하다. 그것이 시계(視界)를 협소하고 답답하게 한다. 나무가 없었다면 시야는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직 상향하는 나무의 기운을 잠재우는 것은 수평을 형성하는 산의 구릉과. 모옥 두 채다. 덕택에 화면은 긴장한다. 더구나 모옥의 하강하는 힘은 대나무처럼 날리는 포무와 또 한차례 수평과 수직의 대립적인 긴장을 연출한다. 이처럼 반복적 대립에서 빚어진 날카로운 긴장감은 실은 허허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그러나 꽉 찬 화면이 어떻게 허할 수 있단 말인가. 있는 것이 없는 것의 배경이라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더구나 그림의 소재가 다만 허함을 역설적으로 알리기 위한 풍경이며, 나무와 산을 빗겨 흐르는 바람의 존재를 증거하는 사소한 배경일 뿐이라면 어떻게 의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림을 응시하길 권유하고 싶다. 그러면 느낄 수 있다고. 날리는 바람만이 느껴지지 않는가. 바람만 있으니 화면은 텅 빈 것 아닌가.

인간은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려도 정신적 허기와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공허감은 더욱 증폭된다. 마찬가지로 그림의 나무와 집과 산 등의 구체적 사물은 화면을 충만하게 채우는 듯 하면서도 오히려 어떤 여백을 강조하는 역설로 기능한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다만 바람 뿐이다. 바람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 아닌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분명 역설이다.

마치 월산대군이 월척의 꿈을 안고 가을 강에 낚시를 떠났다가 문득 깨우친 깨달음의 역설 같은 것이다.

추강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이 시를 월산대군의 여유자적한 삶으로 읽는다면 충분치 않다. 저녁, 월산대군은 가을 강에 당도했다. 배를 타고 도착한 가을 강의 경치는 황홀했을 것이다. 시종들이 동행했을 것이고 어쩌면 한담을 나눌 벗도 함께 했을지 모르겠다. 낚시를 강에 천천히 드리우고 고기의 입질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삼매경에 빠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자족적인가.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입질은커녕 오히려 오한에 몸을 떨었다. 가을의 밤은 예상한 것보다 싸늘한 냉기로 월산대군의 월척에 대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한기가 몸을 스산하게 만드니 고기를 잡는 것보다 냉기를 견디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냉기는 더해지고 고기는 잡히지 않으니 월산대군은 빈배로 돌아올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을 문면 그대로 이해한 것이므로 온전한 읽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을 무심함으로 전환시키는 월산대군의 역설적 상상력이다.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했던 그 역설이다. 실었으되 빈 것이다. 채운 것은 달빛이므로 채워도 당연히 비었다.

빛으로 채워진 '허'. 달빛은 또한 얼마나 무심한가. 월산대군이 잡으려고 했던 고기는 물욕, 즉 세속적 욕망을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배에 실은 것은 고기가 아니라 달빛이다. 대군은 있는 것으로 없음을, 없음으로 있음의 미학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욕망 대신에 무심함, 즉 정신의 허허로움을 만끽하려고 역설적인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본래가 자연을 벗삼으며 은거하기를 즐겼던 대군이니 물욕은 경계의 대상이다. 티끌같은 세속적 욕망조차도 경계하고자 노력했던 대군의 그런 진면목이 종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계산포무도〉 역시 인간의 속기가 철저하게 배제된 무심함을 스산한 바람으로 나타냈다. 여기선 달빛이 아니라 허허로운 바람이다. 이때 산과 나무와 집은 '고기'처럼 '허'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수단이다. 화가는 쓰러질 듯 초라한 누옥에서 세상의 번잡함과 추잡함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종횡무진하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탈속의 경지가 이처럼 간결하게 함축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겸손되고 진실한 붓놀림이다. 적막하지만 요요한 필치, 몽당하고 갈라진 붓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정신의 자유를 표현해 낸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추사체처럼 광기어린, 그러나 단호한 화제의 필체가 더욱 그렇다.

이처럼 전기는 세속의 욕심을 떨친 사의를 소탈하지만 과감하게 표현하였다. 자유분방한 터치 속에 감추어진 고독한 예술혼이 그의 그림에는 정중동(靜中動)의 세계로 재현되어 있다. 이것이 완성된 것이 그의 나이 24세 때라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의 능력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것, 29세 천재의 요절을 두고 조희룡이 피눈물을 흘린 것에서 간접적이나마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조용훈 yhcho@sugok.chongj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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