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가깝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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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박광순
천안시사회복지협의회장

운동이라야 한 20분 정도 거실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걷는 것이 전부다.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빼먹지 않으려 기를 쓰지만 자주 게으름을 피운다. 오늘도 그 녀석과 싸움하다시피 하며 걷는데, 목발의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목발을 거꾸로 뒤집었더니 ‘아니 이렇게 까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발의 고무가 한쪽만 닳아서 움푹 꺼져있다. 목발 양쪽이 어쩜 이렇게도 똑같이 닳았고,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신기했다.

이것을 지금에야 발견한 것이 이상할 정도요, 움푹 팬 상태기에 넘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찰고무이기에 웬만하면 잘 닳지 않고, 닳아도 저렇게 움푹 꺼질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목발을 좌우로 번갈아 짚지 않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케도 오른쪽 왼쪽을 골라내는, 몸으로 경험된 감각의 지도가 있나 싶다. 마치 왼쪽에만 짚는, 오른쪽에만 맞는 목발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러스트=박소정

그 목발의 고무를 새것으로 바꾸려다, 실내에서 짚는 것이고 아직은 버리기가 아까워 아들을 불렀다. 너무 단단하게 신겨진 신발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다. 신발의 위치를 바꾸기보단 왼쪽과 오른쪽 목발을 바꾸어 짚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발과의 관계는 아내보다 더 예민하다고 하면 틀리지 않다. 일부러 바꿔 짚으려 노력을 한다 해도, 습관처럼 원래 짚던 그 목발을 다시 짚으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목발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평생 붙어살아 왔다. 목발이 옆에 없으면 맘대로 움직일 수 없고, 불편하기에 늘 다리로서 역할을 하도록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 한갓지게 저쪽에 갖다 놓으려면 한사코 말린다는 것이다. 목발을 가까이 놓기가 비좁아도 바로 옆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정이 듬뿍 든 관계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이 들었다는 것은 깊고 잔잔한 마음의 흐름이다. 그러기에 정은 오랫동안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생겨난다. 또한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생겨난다. ‘정이 든다’는 말은 다양한 관계에서 두루 사용된다. 심지어 연인사이에서도 ‘사랑이 깊어졌다’라는 말보다 ‘정이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때가 있다. 이렇듯 정은, 가까이 할 때 든다. 가까이 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마음에 둔다는 것이다. 즉 애착을 갖는 것을 말한다.

애착을 갖는다? 그렇다면 목발에 애착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고 반문해본다. 목발은 곧 다리이고, 그래서 그것이 없다는 것은 꼼짝을 못한다는 뜻일 게다. 목발을 멀리 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화장실에 가든, 갑자기 어떤 일이 있을 때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겁나게 가까운 애착관계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목발이든, 휠체어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애착관계라는 말에 맞장구치지 못한다. 이는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자존감의 결여 때문이다. 그러니 보장구인 목발이나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겐 애착이 아니라 못마땅한 미움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와 늘 함께 하는가. 비록 살아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갓지게 저쪽에 갖다 놓으려하면 ‘나와 정이 들어서’, ‘나와 애착관계라’하면서 매우 친하고 가깝다는 자랑을 한다면 어떨까.

아무리 아름답고 경이롭다 해도 가까이 있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늘 움직일 때면 만나야 하는 목발. 그가 없으면 언제고 화석이 되어 있을 터인데, 그것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냥 쓸모 있는 우리를 보조하는 기구 정도로만 여기는 것은 좋은 친구와의 관계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친구이기에 더 가깝게 어우러지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보조기구들이 찬밥이요 혐오스런 대상이요, 쉽게 만질 수 없는 낯설음이라는 생각을 떨쳐내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이다.

박광순 천안시사회복지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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