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무너진 기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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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창극
대기자

한 나라의 위기는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다. 나라의 흥망성쇠도 내부에 달려 있다. 어마어마한 강대국으로 보였지만 스스로 무너진 제국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도발을 유도한다. 반면 밖으로부터 거센 도전이 온다 해도 내부가 뭉쳐 있으면 작은 나라라도 결국엔 살아남는다. 내부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가치의 혼란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삐걱거리고 다른 소리가 나온다. 판단이 각각이니 사회는 분열로 치닫는다.

 나라나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혼란스러운 이유는 이러한 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데모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았다고 비판한다. “이 추운 겨울날 웬 물대포냐”고 여당까지 경찰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인권을 내세웠다. 그렇다면 불법을 방치해야 할까. 물대포를 포기한 경찰은 적절한 대비 없이 시위 진압에 나섰다가 경찰서장이 시위대에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불법시위를 막는 게 우선인가, 아니면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인가. 국회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기막힌 일이다. 그러나 장본인은 오히려 국회에 폭탄을 터뜨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미FTA 통과에 대한 반발이다. 한쪽은 여당이 단독처리를 한 데 대한 보복이니 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견을 실현시킬 수 없는 소수는 국회에서 테러를 해도 무방한 것인가? 국회는 이 문제에 대해 묵묵부답이다. 판사들이 SNS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 문제도 그렇다. 당사자는 “판사도 사람인데 개인의 의견을 표현할 수 없단 말이냐”며 항의한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그가 법복을 입은 판사이기 때문이다. 판사라는 직책 없는 개인이 의견을 말했다면 이런 파문은 없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판사의 정치적 중립성보다 더 소중한가? 이런 혼란이니 코미디 ‘애정남’이 인기를 끌고 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멘트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안정된 사회일수록 가치판단에 갈등이 적다. 그렇다고 사회가 다른 가치는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가치로만 일사불란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가치의 갈등도 정도의 차이일 뿐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가치에 대한 관용이 전제되어야 작동된다. 즉 다원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우선순위에 대한 판단이다. 우선을 정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상대주의이다. 상대주의란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공산주의나 자유민주주의 중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송두율 같은 사람이 내세우는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것도 바로 상대주의의 산물이다. 북한이 독재를 하고 인권탄압을 해도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 입장이 되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주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모든 것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 것인가? 그 가운데 나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 사회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갈 것인가? 실용주의도 문제다. 실용의 기준은 상황이다. 그때그때 필요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기준이 늘 변하니 스스로 혼란을 만들어낸다. 근본주의가 너무 경직되어 변화를 못 따라간다면 실용주의는 너무 유연해서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린다.

 우리는 지난 세월 잘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바로 이러한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해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내 자식이니 당연히 부모의 생각을 따라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성세대가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동안 아이들의 머리는 엉뚱한 사람들이 차지했다.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교육이고 문화다. 지금 국민들이 법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면 그렇게 교육받고 그런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헌법이나 법은 공동체의 가치가 응집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행동의 준거가 되는 것이다. 법은 다른 가치와 비교해 상대적인 가치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조차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혹시 법이 사회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에 맞게 개정할 수는 있다. 그리고 법으로 정했으면 그것을 지켜야 공동체가 유지된다.

 요즘 복지가 화두다. 가진 사람들이 기부 등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질을 나눈다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오게 될까? 아니다. 우리가 믿었던 개인의 자유와 책임, 인권, 번영, 법치라는 가치가 다음 세대에도 보편적인 가치로 전승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