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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공명의 화공, 관우의 수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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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장면 1. 그해는 주말에도 늘 출근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추석 연휴 쉬게 되어 집사람과 극장에 갔다. 영화관람 중에 업무용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평소 같으면 바로 받았겠지만 애써 무시하고 영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개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같은 발신자였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통화하고 다시 영화를 보려던 생각이 사치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며칠 내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혼자 보고 가라는 문자를 집사람에게 보내고는 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2008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때였다.

 그날 이후는 날마다 전쟁이었다. 새벽부터 국제금융시장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수정예산과 추경예산을 통해 ‘선제적’이고 ‘충분’하며 ‘단호하게’ 재정을 풀었다. 통화당국은 금리를 낮추었고 원화와 외화 유동성도 풀었다.

 장면 2. 거의 정확히 3년 후 남유럽발 재정위기가 왔다. ‘일자리’와 ‘맞춤형 복지’를 화두로 내년도 예산편성 막바지 작업 중이었다.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고 복지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지만 2013년 균형재정을 목표로 건전재정에 역점을 둔 예산안을 짰다. 글로벌 재정위기가 급격한 경기침체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은 아니었고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 곳간을 채워놓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더 큰 위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결국 전혀 다른 모습으로 두 번의 경제위기에 대응했다. 일각에서는 내년도 예산안을 3년 전과 비교하며 ‘무사태평 예산’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도 상황에 따라 전략이 달라지는 법이다. 같은 조조(曹操) 군을 상대로 공명은 적벽에서 화공(火攻)을 썼지만 관우는 번성에서 수공(水攻)을 썼다. 위기의 내용과 여건에 따라 대처방법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다른 모습의 위기를 두 번이나 온몸으로 겪는 위치에 있으면서 위기극복을 위한 세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 우리에겐 남다른 위기극복의 DNA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금융위기 극복과정에서 확인했듯이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위기를 극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발전시키는 뛰어난 능력이 있다.

둘째, 정책의 일관성이다. 논란이 있더라도 경제정책의 방향을 잡으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과 추진의지에 대한 정부의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셋째, 위기가 오기 전 ‘선제적 위기관리’의 중요성이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재정건전성 확보가 중요하다. 지난 금융위기도 튼튼한 재정 덕에 극복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위기 때 고통이 더 클 서민과 취약계층을 위한 정교한 미시정책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앞으로는 크고 작은 경제위기가 수시로 올 것으로 보인다. 세대·계층 간 갈등이 더해져 대처하기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화공을 쓸지 수공을 쓸지는 어떤 위기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 승부는 튼튼한 재정이 가를 것이다. 돈을 더 쓰자는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정치일정을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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