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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사고 … 저래서 사고 … 또 200장 음악이 좋아서? 포장 뜯는 맛에 사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7호 27면

택배로 또 날아온 시디 박스를 막 풀어놓는중이다. 한 200여 장 되려나. 프리랜서 생활 15년여 가운데 수입이 가장 나쁜 시절을 보내는 중인데 잘하는 짓이다. 늘 사먹던 밥도 직접 취사로 바꿨고 택시 대신 교통카드를 빵빵히 채워 갖고 다니는 형편이지만 안 고쳐지는 병이다. 죽을 때까지 판은 사야 할 것 같다. 유별나게 비싼 LP는 장차 좋은 날을 기약하며 구입을 포기한 지 1년도 넘었다. 하지만 시디는 도리가 없다. 사정 모르는 분들을 위해 정보를 드린다.

詩人의 음악 읽기 음반 쇼핑 중독

음악 파일을 다운받아 듣는 세상이 됐다. 음반회사들이 망조가 든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레코딩 역사 100년사에 별 같은 명반들이 오죽 많은가. 음반사들의 밀어내기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 한 장 한 장 요란하게 홍보하며 출시하던 음반들을 별별 타이틀을 붙여 묶음판매를 한다. 172장짜리 바흐 전집물이 있는가 하면 모차르트 전곡집은 170장이다. 연주자별로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악기별로, 시대별로, 레이블별로 또는 특정 테마별로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하도 종류가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한번 인터넷 서점 음반 코너를 두드려 보시라. 첫째, 물량에 놀라고 둘째, 가격에 놀란다. 게다가 나 같은 빠꼼이들이 별도로 찾는 ‘어둠의 경로’를 활용하면 과거 1장에 1만5000원 내외로 구입하던 시디를 1000~2000원 가격에 산다. 물론 기왕에 낱장으로 갖고 있던 음반과 어지간히 겹칠 각오는 해야 한다.

오늘 도착한 것 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위 사진) 모음이다. 몇 해 전에 이미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로 독주, 협주, 실내악별로 세 세트를 구했었다. 이번엔 EMI에서 나온 건데 3세트 총 17장으로 나이 든 할머니 아르헤리치를 들을 수 있다. 흔히 귀기 어린 정열의 피아니즘으로 아르헤리치를 말하지만 노년기의 그녀는 많이 느려지고 좀 무거워졌다. 지난 세기풍 거장의 향취가 담뿍하다. 한국 출신 피아니스트들을 잘 챙겨준다고 하니 왠지 더 정이 가는 듯도 하고.

바흐 전집도 여러 종류가 나왔다. 핸슬러는 무려 172장의 CD에 바흐의 모든 음악을 담았다.

소니에서 출시한 베를린 필 시절의 아바도 에디션 3세트 15장도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뒤늦게 전설이 되는 듯하다. 1급 지휘자인 건 틀림없지만 특별히 환상을 안겨주는 인물도 아니고 좀 모범생 같은 인상이 짙었다. 그런데 암 수술 후에 다시 나타난 그에게서는 다른 풍모가 느껴진다. 어떤 절절함이랄까. 애호가들이 그의 지난 연주들을 다시 듣고 새삼 굉장한 능력자였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미 보유한 음반들과 절반 이상은 겹칠 테지만 일목요연한 이 전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이치그라모폰의 12장짜리 카를로스 클라이버 에디션 역시 같은 이유로 또 구입했다.

데카에서 악기별로 묶어내는 마스터웍스 시리즈도 아주 좋다. 지난해 ‘바이올린’을 구입했는데 이번에는 ‘피아노’ 편이 나왔다. 각각 50장씩인데 한마디로 역사상 유명한 피아노 연주가 몽땅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더 데카 사운드’ 50장 전집도 함께 구입했다. 이건 오리지널 재킷 그대로다. 하나하나 낱장으로 구했던 것이 대부분 이미 있지만 데카 전성기의 위용이 탐나서 또 구했다. 파울 판 네벨 지휘의 르네상스 음악 모음 ‘a secret labyrinth(미궁)’도 기대된다. 원래 60장 전집인데 내가 구입한 것은 15장 요약본이다.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인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 에디션 4세트도 있다. 쇤베르크 편, 베르크 편, 바르토크 편 또는 여러 작곡가 편으로 세트당 5장씩 묶어 나오는데 뉴욕필 상임 시절을 포함해 불레즈의 음악적 편력 과정을 추적해 나갈 수 있다. 그가 생각만큼 전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목록은 한참 더 나가지만 이쯤 해야겠다. 그렇게 쌓아놓고 언제 들어볼 거냐는, 내가 일평생 주위에서 받아온 핀잔이 자동으로 들려오는 탓이다. 즐거움의 크기를 상중하로 나눈다면 정작 음악을 듣는 일은 중에 해당될 것 같다. 긴 목록을 더듬으며 고민의 과정을 거쳐 결국 신용카드를 휘날리고 마침내 도착해 포장을 뜯을 때의 그 삼삼한 기분. 그것이 상지 상이다. 그럼 하는? 흐흐흐…. 이미 갖고 있는 줄을 모르고 또 구입했을 때의 난감함이지. 남에게 줄 선물을 산 셈이랄까.

돈 주고 물건을 사는 행위의 의미가 뭘까. 소비, 낭비, 탐욕? 그런데 어떤 건축가의 책에서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원시시대 인간이 야생의 숲에서 사냥하던 본능이 쇼핑 행위로 고스란히 이전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음반 탐욕은 음악을 사냥하는 행위다. 그리고 비웃는 종자들에게 방어적으로 쏘아붙인다. 넌 뭐 안 사느냐고. 안 산다는 종자에게는 더 쏘아붙인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무슨 영광 보려 하느냐고. 그런데 이 대목에서 딸꾹! 정말로 가난해서 무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나는 모기 소리로 외친다. 나도 지난날 ‘한 가난’ 해봤다고. 뭐 한풀이도 못한당가. 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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