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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 지뢰밭인 블랙 스완의 시대, ‘설마’가 기업 잡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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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24면

미국의 글로벌 화학기업 듀폰의 최고경영자(CEO) 찰스 홀리데이 주니어는 2008년 10월 일본 방문 중 충격을 받았다. 잘 돌아가는 줄 알았던 듀폰 현지법인의 경영진으로부터 현금흐름에 이상징후가 감지돼 현금 확보에 주력하겠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전 세계로 파급되던 금융위기의 징후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위기의 조짐은 미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자동차 도장용 페인트 시장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듀폰의 페인트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다. 더 심각한 건 그간 비교적 꾸준했던 자동차 회사 예상 주문량마저 파악 불능에 빠진 것이다. 급격한 소비둔화의 여파로 생산량 줄이기에 급급한 자동차 업계도 페인트 소요량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뉴욕 월가의 신용위기로만 여긴 문제가 전 세계로 확산될 조짐이 분명했다. 실제로 상당수 기업이 운용자금 확보에 매달려야 할 처지에 서서히 내몰리고 있었다.

딜로이트와 함께하는 위기관리 비법 ② 리스크 인텔리전스 경영

홀리데이는 즉시 사내 최고위 경영진을 소집했다. 위기가 실체를 드러냈으며 대응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감대를 이뤘다. 이어 17개 팀이 나흘간 마라톤 회의를 거쳐 회사 생존에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결정했다. 이렇게 마련한 위기대처 방안은 며칠 안에 전 직원들에게 소상히 전파됐다. 당면 과제인 현금 확보와 비용절감을 위해 임직원들에게 각자 할 바를 명확히 전달했다. 그로부터 수일 내에 임직원들이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위기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어떠한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전반적으로 회사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일 미디어가 경고음을 낸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내 소통을 원활히 해 위기를 내 일로 받아들이고 피부로 실감했던 것이다. 불필요한 출장과 회의를 줄이고 외부 발주 용역도 눈에 띄게 줄였다.

이는 위기 대응 과정에서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경우다. 홀리데이는 최고경영진과 수시로 머리를 맞대면서 위기 상황을 몸소 챙겼다. 밑에서 올라온 보고에 만족하지 않고 신속하게 주요 조치들이 실행되도록 독려하고 현장을 점검했다. “내년 2월에 할 일이라면 지금 당장 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위기의 격랑에 맞서 조직을 결속시킨 것이 CEO의 역할이었다.

사실 듀폰은 오래전부터 위기 대응을 전사적으로 중시하면서 상세한 매뉴얼을 짜놨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듀폰의 초기 대응방안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데 채 6주가 걸리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러한 리스크 관리 문화에 힘 입은 바 크다. 2001년 9·11 사태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리스크 경영, 생존과 성장의 펀더멘털
혁신의 대명사, 변신의 귀재 등으로 알려진 글로벌 초일류 기업 듀폰. 200년 넘는 업력을 쌓아오며 시장선도기업의 입지를 탄탄히 한 비결은 끊임 없는 기술개발과 혁신 외에 리스크 인텔리전스(Risk Intelligence) 경영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리스크 관리는 그 자체가 듀폰 경영의 핵심이자 역사라 할 만하다. 70여 개국에 6만여 명의 직원과 70여 곳 연구시설을 두고 약 2000 종의 제품을 생산, 유통하는 듀폰은 조직구조와 업무 특성상 숱한 잠재 리스크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빠른 진화에 대응하고 시장 선도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지속하는 가운데 대형 리스크가 자주 불거졌다. 이런 환경은 예기치 못한 긴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론이 자라나는 토양이기도 했다. 회사의 임직원 각자가 리스크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다는 ‘통합적 리스크 관리 관점’을 전사 차원의 전략으로 채택했다. 이로써 방대한 내부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상황에 적응하는 리스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복잡계와 불확실성을 관리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교훈과 시행착오를 지식경영 시스템에 집적했다. 유사한 재난에 쉽게 대응하고 같은 실수의 재발을 줄였다. 듀폰이 자랑하는 ‘리스크 지도(Risk Map)’는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웬만한 상황을 식별하고 유형화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듀폰 위기관리의 핵심은 위기 때 ‘실질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대응역량 확보에 있다. 실제로 듀폰의 시스템은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제 위기 때 쓸모 없는 시스템도 있다. 엔론은 한때 떠오르는 세계적 에너지기업이었다. 미국 텍사스주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회사로 출발해 순식간에 미 재계 서열 5위로 급성장했다. 고속성장 덕에 교과서나 강의에 초우량 기업으로 다뤄졌다. 리스크 관리와 내부통제시스템의 모범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 회사의 위험관리 시스템은 외견상 그럴 듯했다.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Chief Risk Officer)라는 위기관리 전담 임원 아래 150여 명에 이르는 리스크 관리 조직과 시스템을 갖췄다. 리스크 관리에 연간 3000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썼다. 그러나 회계부정과 파산이라는 치명적인 재앙 앞에서 화려한 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 끊임없는 인수합병(M&A)과 신사업 진출에서 파생되는 숱한 리스크를 사전에 잡아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회사 내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결과적으로 묵인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리스크 관리는 차세대 경쟁력에 필수
기업의 경쟁력 하면 흔히 거창한 아이디어나 시도를 연상하지만, 실상은 평범한 실천이 중요할 때가 많다. 성공 기업 중에는 다들 뻔히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원칙을 집중 실천한 경우가 많다. 성공적인 리스크관리 비결도 마찬가지다. 위험관리에 실패한 기업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 대부분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잘못된 가정과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의존하고, 실패의 가능성에 둔감하며, 단기 성과에 너무 집중한다. 각 사업부문과 외부환경 간 연결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주요 리스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문제는 날로 복잡해져 가는 경쟁환경 속에서 리스크 관리의 성패가 기업의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그럭저럭 넘어갔을 법한 일이 다른 요인과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치명상을 초래하는 경우다. 위기가 일상화하는 가운데 ‘블랙 스완(Black Swan·가능할 법하지 않은 큰 사건)’이 빈발하는 세상이다. 실제로 미국 대표기업 CEO들이 주도하는 국가경쟁력위원회는 기업경쟁력 확보를 위한 다섯 가지 이니셔티브 중 하나로 리스크 관리를 꼽았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같은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며 기업들이 터득한 당연한 진리이기도 하다. 국내 기업 중에 시장과 기업환경의 작은 변동에도 우왕좌왕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곳이 여전히 많다. 리스크 관리의 기본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인식 전환과 실천이 시급하다.



유종기 컨설턴트. 고려대 국제대학원을 나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IBM에서 전략 수립과 컨설팅 업무를 했다. 딜로이트에서 기업위기관리와 지속가능경영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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