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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EBS 수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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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사대부(士大夫)가 과거 급제에 목을 매는 이유는 신분 상승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과거의 형식화였다. 과거 시험 유형을 분석해서 기출문제나 예상문제를 모아놓은 책이 『과문초집(科文抄集)』, 줄여서 『초집(抄集)』이다. 모범시를 모아놓은 ‘과시(科詩)’와 외교문서인 표전(表箋)을 모아놓은 ‘과표(科表)’ 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우수 답안을 모아놓은 ‘선려(選儷)’도 있었다. 과거시험용 공부법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과거의 폐단을 논하다(論科擧之弊)’에서 과거의 폐단을 크게 비판하고, 이런 정형화된 답을 없애자는 ‘금오칠언(禁五七言)’을 썼다. 이익은 ‘금오칠언’에서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과시(科詩)와 과표(科表)의 형식이 있다”면서 “구절마다 일정한 틀〔套〕이 있고, 글자마다 형식에 맞추는데, 그 방법은 극히 어려우면서도 극히 쉽다”고 말했다. 극히 어려우면서도 쉽다는 것은 방법만 익히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방법 익히기에 유리한 부잣집 자식들이 유리했다.

 형식화된 과거 시험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있었다. 금산 칠백의총의 주인공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이이(李珥)는 일찍이 석담서당(石潭書堂)에서 학생들에게 『과문초집』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면서 “오직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먼저 장려하여 가르치고 점차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게 했으며 경학(經學)에 밝지 못하고 문리(文理)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중봉집(重峯集)』)”고 말했다. 이익도 유형화된 이런 과거를 가지고 ‘경(卿)과 상(相)에 임명된다’면서 “이 때문에 어린아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구속을 받는다”고 비판했다. 이익은 “그래서 온 세상이 모두 이욕(利欲)의 와중에 빠져서 백성들의 좋은 풍속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문제를 비판하는 것 같다. 현재 수능에 목매다는 것도 대학이 학문 연구보다는 신분 유지나 상승의 기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올해 수능 문제 70%가 EBS 강의 및 교재와 연계해 출제됐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조선으로 치면 『과문초집』에서 출제했다고 밝힌 셈이다. 특정 교재에서 70%를 출제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정도에서 이탈한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省察)마저 없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