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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단체가 할 일은 ‘野黨노릇’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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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공회의소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의 진원지는 박용성 신임 회장(60). “모든 사업을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는 취임 일성이 신호탄이 됐다. ‘재계의 맏형 노릇’을 하겠다는 그의 발언으로 다른 경제단체들까지 덩달아 바람을 타고 있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에 이어 2대째 상의 회장을 맡은 그와 서울 남대문의 대한상의 5층 회장 접견실에서 마주 앉았다.

─남북경협 지원과 관련해 정부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까?

“정부가 해 줄 게 많습니다. 이중과세방지협정·투자보장협정 등 경협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기·수송·통신 등 사회간접자본(SOC) 공사를 정부가 나서서 추진해야 합니다. 인프라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 줘야 돼요. 우리 예산을 쓰자는 게 아니라 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의 자금을 들여오라는 거죠. 예를 들어 특정 공단을 지정해 통신에 대한 투자는 올해 말, 전기는 내년 말 하는 식으로 정부가 일정을 제시하고, 민간기업들이 그에 맞춰 ‘언제 공장을 세우면 되겠구나’ 하는 식으로 사업이 진행돼야 합니다. 대북사업은 언제 흑자가 날지 모릅니다. 기업은 북한에 자선사업하러 가는 게 아닙니다. 커머셜 베이스에서 투자가 이뤄져야지 감상적 투자는 안 돼요. 가령 중국에 투자하는 것보다 물건이 싸고 질이 좋아야죠. 북한의 수용태세에도 달렸지만, 정부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철저하게 시장원리에 따라 추진돼야 합니다.”

─북한의 인력 수준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TV 등 전자제품 조립 면에서 세계적으로 잘 훈련된 인력이라지요? 동기 부여만 되면 하루 25시간도 일하는 게 우리 민족입니다.”

─자금시장이 여전히 불안합니다. 정부의 긴급대책으로 다소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긴 합니다만….

“4대 그룹만 돈이 도는 게 문제입니다. 회사채 발행이 안 되고 있어요. 신용이 바닥인 기업부터 회사채 발행이 안 되기 시작했다면 모르지만 요즘 상황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돈이 투신·종금사에서 은행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합병을 앞두고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느라 갈 길이 바쁜 은행들은 정부 말을 잘 안 듣고 있구요. 은행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풀어야죠.”

─관치를 해서라도 풀라는 건가요?

“정부가 완충역을 해 줘야 한다는 거죠. 이대로 가다간 기업들이 흑자도산을 할 게 뻔한데, 일부 CP(기업어음)·회사채에 대해선 정부가 한시적으로 보증을 서 준다든지 비상수단이라도 동원해 막아야 합니다. 2차 금융 구조조정을 후딱 해치우든지….”

─경제단체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의도 2003년이면 법정단체라는 프리미엄을 내 놓아야 하는데요.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사이버 시대, 전자정보통신 시대에 맞게 회원사들의 권익을 보호해야죠. 상의법 개정에 따라 2003년 의무가입에서 임의가입으로 바뀌는 것에 대비해 새로운 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62개 지역 상의별로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한편 이 메일 네트워크를 구축중이죠. 전자상거래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생산품목 등 각 기업의 정보를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기업 DB 구축을 추진중이구요. 우리나라는 구내식당서 쓸 컵을 사려고 해도 유리 도매상 아니고는 누가 만드는지도 몰라요. 해당 업계의 수직계열화돼 있는 사람들만 압니다. 이걸 수평적으로 묶어 주자는 거죠. 기업의 기초적인 데이터라든가 재무정보 등 한정된 정보를 다루고 있는 건 있지만 이런 종합적인 기업정보는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게 되면 회사마다 전자 카탈로그를 만들 필요도 없어요. 연내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할 겁니다. 최대 3백억원이 드는 일이라 상의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요. 정부가 지원을 해야죠. 어떻든 전 업종을 망라하고 있는 전국 조직인 상의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단체마다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찾아 해야죠. 저마다 이것도 하겠다, 저것도 하겠다 하다가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정체성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내년 6월 제2차 세계상공회의소 총회의 서울 개최는 어떤 의의가 있나요?

“상의가 국제적인 조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하나의 이정표죠. 1천명 정도 참가할 겁니다. 참가비를 내고 오는 거라 우리 돈은 많이 안 씁니다. 오거나이저로서 뒷치닥거리나 하는 거죠.”

─취임사에서 ‘굴뚝산업에 날개를 달자’고 하셨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간의 바람직한 공존 모델은 뭔가요?

“전자산업 같은 전통산업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백본(등뼈)입니다. 이런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고 IT(정보통신기술)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거죠. 원료를 더 싸게 사들이고 좋은 기술을 들여오고…. 전통산업군에 속하는 증권사가 온라인화하면서 수수료가 내려간 게 가장 좋은 예죠. 경쟁력도 생기고 고객들은 더 싼 값에 증권을 살 수 있게 됐고…. 제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산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여러 일화를 남기셨는데, 모든 기업에 일반화할 수 있는 구조조정의 철학이 있습니까? “기업 차원이든 오너 차원이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핵심역량을 찾아 남들과 비교해 보고 국제비교도 해 보고, 그래서 그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다 싶을 때 하는 겁니다. 아니면 손 터는 거구요. ‘핵심역량’과 ‘경쟁력’이 키워드죠. 이 원칙을 지키면 재벌이 문어발이라는 소리도 자연히 사라집니다. 오너 혼자서 고뇌에 찬 결정을 내리던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4대 개혁의 성과를 어떻게 봅니까?

“금융·기업 구조조정이 제일 잘 됐죠. 노동부문은 된 게 뭐 있습니까? 공공부문은 공무원 숫자는 줄었는지 몰라도, 했는지 안 했는지….”

─가장 잘 된 게 뭔가요?

“금융 구조개혁입니다. 말레이시아·태국 등 환란(換亂)을 같이 겪은 나라들 중 이렇게 많이 한 나라가 없습니다. 은행을 통합한다면서 간판만 통합하고 인사부도 따로 두고 있는 일본처럼 겉치레로 한 것도 아니고.”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돼야 한다고 봅니까?

“동반자이자 협력자입니다. 기업들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는 야당 노릇하는 게 본령이 아닙니다.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게 경제단체의 몫이 아니에요. 기업들의 바람, 업계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그쳐야죠.”

지난 5월 9일 취임한 박회장은 오전에 OB맥주 회장실이 있는 두산타워로 출근했다 오후에 상의로 온다. 점심 약속을 아예 상의 클럽으로 할 때도 잦다. 일의 비중이 절반씩이냐는 물음에 그는 요즘 같으면 상의 일이 90% 이상이라고 했다. 상의회장을 맡고 떠 맡은 직함만 91개.

그는 지난 달 남북정상회담 방북 특별수행원 중 열 명의 경제계 대표에서, 그의 표현을 빌면 피(혈액검사)까지 뽑고도 막판에 빠졌다. 인원이 한정돼 있는 제로섬 게임서 밀려 ‘왕따’를 당했다는 그는 “이게 대한상의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취임 직후 그는 “경제단체장들 모임 기사에서 단체명을 나열할 때 상의를 맨 앞에 써 달라”고 주문을 했다. 그래선지 요즘은 상의를 앞세우는 기사들이 적지 않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던 난개발의 부작용을 지적하고, 중국과의 마늘 재협상을 정부에 건의하는 등 업계의 현안들을 그가 부지런히 챙기고 있는 것도 상의의 이런 위상 높이기에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난 달엔 그 동안 무료로 발급해 온 원산지 증명과 일시 통관 증명을 유료화하겠다고 밝혔다. 수익 모델 찾기의 일환이다.

“경제단체들의 운명은 회원들 스스로 결정하는 겁니다. 남이 무슨 상관입니까? 통합론도 나오는데, 통합을 누가 하란대서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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