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고이 간직한 '애틋함'

중앙일보

입력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수필 〈인연〉의 끝자락인 이 대목을 기억 속에 고이 담아 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스위트피' 를 닮은 아사코와 저자의 인연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세월이 갈라놓고 만 그들의 인연을 자신의 일인 양 애틋하게 여기기도 한다.

동화 속 얘기 같지만 그들에게도 닮은 추억이 있거나 그런 인연을 한 번쯤 마음속에 담아두고픈 욕망 때문이 아닐까.

〈인연〉외에도 딸 서영에 대한 잔잔한 사랑, 봄이 오는 기쁨과 가을의 쓸쓸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생활 등을 시처럼, 음악처럼 들려주는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샘터.7천원). 한편 한편에 담긴 맑은 언어가 가슴을 파고 들며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게 하는 힘을 지닌 책이다.

저자의 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과 꽃 같이 싱그러운 감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얀 표지가 주는 단아함은 화려함이 지나쳐 현란함에 이른 우리 삶을 진정시켜준다.

이 수필집을 찾는 손길은 끊임이 없다. 1996년 출간돼 벌써 27만부가 넘게 주인을 찾아갔다. 올들어서도 매달 1천~2천부는 거뜬하더니 피씨의 구순(九旬)소식이 전해지면서 6월에만 1만부 이상이 나갔다.

당초 피씨의 글은 69년 일조각에서 〈산호와 진주〉란 제목으로 시문선집이 선보였고 80년에 〈금아문선〉〈금아시선〉이 나왔다. 수필집 〈인연〉은 금아문선에 몇 편의 미수록작을 더해 만들어졌다. 또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 〈수필〉은 피씨의 글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정겨운 마음으로 건네주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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