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패전처리투수의 중요성

중앙일보

입력

"선발투수가 일찍 강판한 날, 일본의 패전처리 투수들은 눈이 살아서 움직인다."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4년을 뛰고 귀국한 선동열 KBO홍보위원의 말이다.

선동열 위원은 일본의 패전투수들은 감독에게 항상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특히 선발투수가 일찍 무너진 날은 마운드에서 오래 던질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놀랄만큼 집중력을 갖고 던진다고 전했다.

현재는 패전처리투수지만 감독에게 잘 보여 이기는 경기에 나가는 투수가 되고 언젠가는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하겠다는 꿈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국내의 패전처리투수들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경기에서 전력으로 던질 필요가 있겠느냐는 듯이 집중력이 떨어지는 공을 던지는 투수가 많고 패전처리로 등판하는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을 갖고있는 선수도 있다.

패전처리 투수는 사실 굉장히 힘들다. 언제 등판할지 기약도 없고 던지더라도 결코 많지 않은 이닝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패전처리투수들은 장기 레이스에서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선수들이다.

패전투수들이 지는 경기를 얼마나 깔끔하게 처리해 주느냐에 따라 다른 선수들의 컨디션과 다음 경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올 시즌 국내프로야구에는 패전처리투수에서 일약 팀의 주전투수로 도약한 선수들이 많다. 두산의 한태균, LG 이승호, 현대 신철인이 그들이다.

한태균은 데뷔이후 6년동안 6승에 그쳤던 평범한 사이드암투수.
올해도 패전처리가 주임무였지만 5월24일 현대전부터 선발로 등판하기 시작했고 6월들어 3승1패를 기록했다.

한태균의 낙차 큰 싱커는 타자들이 쉽게 쳐낼수 없는 결정구로 인정받고 있다.

한태균이 선발로 등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패전처리로 등판한 5월의 11경기에서 무실점행진을 펼쳐 김인식감독의 눈에 확 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무명신인 신철인의 도약은 더욱 눈부시다. 계약금 2천5백만원을 받고 입단해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김재박감독이 정명원대신 팀의 제5선발로 낙점할 만큼 위력적인 볼을 던지고 있다.

지난 1일 삼성전에서 3.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프로첫승을 따낸 신철인은 25일 현재 12경기 22.1이닝에서 무려 37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탈삼진쇼를 펼쳤다.

볼끝이 살아 움직이는 빠른 공과 예리한 변화구, 그리고 뛰어난 제구력까지 갖추고 있다. 굴러 들어온 보물이다.

프로 2년째인 LG 이승호도 상한가다. 김용수-장문석-최향남-경헌호가 모두 실패한 팀의 마무리투수로 최종 낙점될만큼 이광은감독의 신임을 얻었다.

현재 3승2패5세이브 방어율은 1.65다. 흔들림없는 두둑한 뱃심과 빠른 공에 대한 자신감, 여기에 제구력까지 갖추고 있다.

패전처리는 선발투수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볼수도 있다. 팀은 이기는 경기가 많을수록 좋지만 패전처리투수들은 팀이 지는 경기를 위해 준비하고 대기한다.

선발투수가 무너졌을 때 눈이 더욱 커지는 선수가 많아지고 승패에 관계없이 전력을 다하는 패전투수들이 늘어날 때 프로야구는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다.

※ 이효봉 - 現 SBS스포츠TV 프로야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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