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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지배하는 평등사회, 원시 교회 공동체가 모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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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25면

모어는 1523년 잉글랜드 하원의장이 됐다. 그는 의장으로서는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청원했다.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8~1535)를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man for all seasons)’라고 불렀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모어의 숭고한 인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에라스뮈스는 모어의 집에서 우신예찬을 집필할 정도로 둘은 우정이나 학문적으로 밀착된 사이였다. 그들은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인이기도 한 모어는 영국의 인문주의자·정치가·법률가·시인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지은 조너선 스위프트는 모어를 일컬어 “영국이 낳은 가장 덕망 높은 인물”이라고 평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32>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영문판(펭귄 클래식판·1965) 표지.

타고난 학자이자 국민 사랑받는 청백리
아버지 존 모어는 법률가였다. 아버지는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갖춘 반듯한 사람이었다. 부전자전이었다. 모어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12세가 됐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턴 경의 가인(家人·serving boy)이 됐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대주교는 모어가 훗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4세에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모어는 라틴어 등 고전·인문교육을 받았으나 2년 후 중퇴했다. 아버지는 모어가 옥스퍼드대에서 인문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모어는 1494년께부터 법률을 공부해 150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모어는 바보(fool)를 의미하는 ‘morus’에서 나왔다. 모어는 평생 이 사실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학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들며 양쪽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총명한 사람이었다. 모어는 탁월한 협상가이자 민중의 사랑을 받는 청백리였다. 그런 모어를 헨리 8세는 총애했다. 대법관·하원의장을 지냈고 1521년에는 기사 작위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모어는 왕을 대신해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7성사(七聖事)의 옹호(1521)와 반(反)루터론(1523)을 집필했다. 감격한 교황은 헨리 8세에게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 defender of the faith)’ 칭호를 부여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 국왕은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어는 가톨릭 신자로서 로마에 충성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했고 왕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모어는 결국 국왕의 노여움을 샀고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당국은 모어의 머리를 삶아 런던다리에 효수했다. 모어는 폭군에 대항하는 양심의 상징이 됐다.

모어의 유토피아 이후 캄파넬라·베이컨·볼테르 등 대문호·사상가들이 다양한 모습의 유토피아를 산 위, 우주, 과거, 미래에 그렸다. 유토피아의 무대는 동시대 서반구의 어느 섬이었다. 라틴어로 저술된 유토피아의 원제목은 국가의 최선 정체(政體)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이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가공 인물인 라파엘 히슬로데이와 유토피아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유토피아는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와 ‘topos’를 조합해 만든 말이다. ‘eu-topos(좋은 곳)’와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자 ‘좋은 곳’이다. 모어는 중의법을 쓴 것이다. 휴트로에우스는 포르투갈 출신의 뱃사람이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항해하다 유토피아를 발견해 그곳에서 5년 동안 살며 그곳 풍습과 사회를 관찰한 것으로 설정됐다.

요즘 기준으론 전체주의적·억압적

유토피아 1권은 당시 유럽 사회를 비판했다. 2권은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유토피아는 노예를 제외한 모든 이가 평등한 곳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남녀 모두 같은 교육을 받는다. 경제적으로는 화폐가 없으며 공유재산제가 실시된다. 귀금속은 어린이 장난감이다. 어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유토피아는 사유재산이 없기에 범죄가 사라진 곳이다.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한다. 유토피아는 농업이 근본이지만 누구나 목공·석공 일과 같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대접받으며 행정관을 선거로 선출하는 곳이다. 행정관의 주 업무 중 하나는 게으름을 감시하는 것이다. 하루 9시간씩 일하고 여가가 많고 물자가 풍성한 곳이다. 병원도 무료다. 실업도 없고 경쟁도 없다. 게으른 것도 나쁘지만 지나치게 일할 필요도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안락사도 허용된다. 모어가 꿈꿨던 이런 이상향의 요소들은 많은 경우 오늘에 이르면서 현실화됐다. 반면 오늘 기준으로 보면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요소가 발견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지면 평생 강제로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 노예도 있다.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간통과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면 노예가 돼야 한다. 허가 없이는 여행도 다닐 수 없는 곳이다. 허가 없이 여행하다 두 번째 걸리면 노예가 돼야 한다. 유토피아는 따분한 곳이기도 하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중세 수도원과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원시그리스도교회 신도들의 공동체가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한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가 유토피아에서 말한 내용이 진심인지 풍자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이 없다. 어쨌든 유토피아는 ‘이상향(理想鄕)’의 대명사가 됐다. 모어는 유토피아로 유토피아 문학과 사상, 근대 유토피아주의(utopianism)의 창시자가 됐다.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말도 파생됐다. 암흑향(暗黑鄕), 지옥향을 뜻하는 말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의 전개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 정치가 카를 카우츠키(1854~1938)는 모어가 초기 사회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유토피아주의는 사회주의와 만나 다양한 공동체 결성운동으로 발전했다. 유토피아를 시도하는 공동체가 수천 개에 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그전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대체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고 생각했다. 1975년에는 유토피아학회가 결성됐다.

영국 사학자·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97)은 유토피아주의의 결과는 자유가 아니라 폭정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 칼 포퍼(1902~94)는 지상천국을 꿈꾸는 자들은 지상지옥을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유토피아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낳는다는 뜻이다.

자녀·아내에게 직접 인문고전 교육
모어는 성직의 길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약 4년 동안은 수사들의 생활을 체험했다. 기도와 단식 끝에 자신이 성직자 재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을 공부했다. 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유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는 위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 생활에서 익힌 기도·단식·참회의 생활을 평생 실천했다. 모어는 오후 9시에 취침해 오전 2시에 일어났다. 모어는 성직의 길을 가지 않고 결혼해 성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평생 죄의식을 지녔다. 그래서 그는 ‘고행자가 입는 마모직(馬毛織) 셔츠(hair shirt)’를 입었고 스스로에게 매질을 가하기도 했다.

모어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장녀 마거릿은 아버지가 화난 것을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어는 여자도 고전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은 선각자였다. 그는 자녀교육을 위해 집에, 우리로 치면 ‘서당’을 차렸다. 마거릿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으로 자라났다. 마거릿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다. 당시 다른 여성들처럼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아내 제인 콜트에게 라틴어와 문학, 음악을 지도하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제외한 모어의 저작들에는 성스러움과는 좀 다른 모습도 드러난다. 그는 야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즐기기도 했다. 모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또한 그의 권위주의적인 성격, 이미지 조작 시도와 같은 결함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관용과 종교적 자유를 옹호했다. 유토피아에서는 무신론마저도 멸시의 대상이지만 허용됐다. 현실에서는 달랐다. 모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혹했다. 그들에게 생욕을 해댔고 그들을 불태워 죽이는 데 적어도 간접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루터가 수녀들과 ‘근친상간’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루터교의 등장은 모어 입장에서 문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모어는 북부유럽 르네상스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종교개혁이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인문주의의 발전을 저지했다는 주장이 있다. 모어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그 주장은 어쩌면 맞는 말이다.

모어는 1886년 로마가톨릭교회의 복자, 1935년에는 성인이 됐다. 2000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정치인과 정치가의 주보 성인’으로 선언했다. 한편 시성제도가 없는 영국성공회는 그를 성인력에 올리고 ‘종교개혁의 순교자(Reformation martyr)’로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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