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8~1535)를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man for all seasons)’라고 불렀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모어의 숭고한 인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에라스뮈스는 모어의 집에서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32>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타고난 학자이자 국민 사랑받는 청백리
아버지 존 모어는 법률가였다. 아버지는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갖춘 반듯한 사람이었다. 부전자전이었다. 모어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12세가 됐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턴 경의 가인(家人·serving boy)이 됐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대주교는 모어가 훗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4세에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모어는 라틴어 등 고전·인문교육을 받았으나 2년 후 중퇴했다. 아버지는 모어가 옥스퍼드대에서 인문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모어는 1494년께부터 법률을 공부해 150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모어는 바보(fool)를 의미하는 ‘morus’에서 나왔다. 모어는 평생 이 사실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학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들며 양쪽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총명한 사람이었다. 모어는 탁월한 협상가이자 민중의 사랑을 받는 청백리였다. 그런 모어를 헨리 8세는 총애했다. 대법관·하원의장을 지냈고 1521년에는 기사 작위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모어는 왕을 대신해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그러나 모어는 가톨릭 신자로서 로마에 충성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했고 왕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모어는 결국 국왕의 노여움을 샀고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당국은 모어의 머리를 삶아 런던다리에 효수했다. 모어는 폭군에 대항하는 양심의 상징이 됐다.
모어의
요즘 기준으론 전체주의적·억압적
유토피아에서는 안락사도 허용된다. 모어가 꿈꿨던 이런 이상향의 요소들은 많은 경우 오늘에 이르면서 현실화됐다. 반면 오늘 기준으로 보면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요소가 발견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지면 평생 강제로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 노예도 있다.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간통과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면 노예가 돼야 한다. 허가 없이는 여행도 다닐 수 없는 곳이다. 허가 없이 여행하다 두 번째 걸리면 노예가 돼야 한다. 유토피아는 따분한 곳이기도 하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중세 수도원과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원시그리스도교회 신도들의 공동체가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어가
모어의
영국 사학자·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97)은 유토피아주의의 결과는 자유가 아니라 폭정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 칼 포퍼(1902~94)는 지상천국을 꿈꾸는 자들은 지상지옥을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유토피아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낳는다는 뜻이다.
자녀·아내에게 직접 인문고전 교육
모어는 성직의 길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약 4년 동안은 수사들의 생활을 체험했다. 기도와 단식 끝에 자신이 성직자 재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을 공부했다. 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유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는 위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 생활에서 익힌 기도·단식·참회의 생활을 평생 실천했다. 모어는 오후 9시에 취침해 오전 2시에 일어났다. 모어는 성직의 길을 가지 않고 결혼해 성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평생 죄의식을 지녔다. 그래서 그는 ‘고행자가 입는 마모직(馬毛織) 셔츠(hair shirt)’를 입었고 스스로에게 매질을 가하기도 했다.
모어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장녀 마거릿은 아버지가 화난 것을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어는 여자도 고전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은 선각자였다. 그는 자녀교육을 위해 집에, 우리로 치면 ‘서당’을 차렸다. 마거릿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으로 자라났다. 마거릿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다. 당시 다른 여성들처럼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아내 제인 콜트에게 라틴어와 문학, 음악을 지도하기도 했다.
모어는 북부유럽 르네상스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종교개혁이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인문주의의 발전을 저지했다는 주장이 있다. 모어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그 주장은 어쩌면 맞는 말이다.
모어는 1886년 로마가톨릭교회의 복자, 1935년에는 성인이 됐다. 2000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정치인과 정치가의 주보 성인’으로 선언했다. 한편 시성제도가 없는 영국성공회는 그를 성인력에 올리고 ‘종교개혁의 순교자(Reformation martyr)’로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