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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나갈 곳 막고 "일단 6월은 넘기자"

중앙일보

입력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인 A사는 하청업체에 주어야 할 공사비 지급을 이달 말까지 잠정 중단했다.

전국에 수십개의 아파트 건설현장이 있는 이 회사의 한달 평균 공사대금은 2백50억~3백억원. 당국에 적발되면 불공정 거래행위로 처벌받겠지만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회사 관계자는 "하청업체에 공사대금을 6월이 지난 뒤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면서 "회사채나 기업어음(CP)발행을 통해 자금을 끌어쓸 수 없는 판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길은 지출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고 말했다.

기업들이 극심한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우선 투신과 종금사 등 제2금융권이 부실처리 때문에 금융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자금이 몰린 은행권에선 합병 등 금융산업 개편을 걱정하는 가운데 6월 말 결산 때 자기자본비율(BIS)을 맞추기 위해 돈을 움켜쥐고 있다.

그 결과 최근 신용등급이 BBB로 양호한 기업도 만기가 된 회사채를 갚기 위한 차환(借換)회사채 발행을 못하는 실정이다.

B사 자금담당 金모 전무는 "한계상황에 도달한 기업이 많아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이달 말을 전후해 두손을 들 기업이 적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 돈 나갈 곳을 막아라〓회사채 차환발행과 CP 연장(리볼빙)이 어렵자 기업들은 급히 지출축소에 나섰다.

C사 李모 상무는 "증시의 장기불황으로 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금을 확보하려면 돈 나갈 곳을 막는 게 최선" 이라면서 "신규투자는 물론 시설 개.보수까지 하반기로 미뤘다" 고 말했다.

그는 "언제 자금을 급하게 써야 할 지 몰라 여유자금을 은행권의 단기금융상품에 넣어두고 있다" 고 말했다.

모그룹 회장은 "외환위기 때 자금부족으로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대우사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현금을 확보해 두었고 이달 초 수백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에 여유가 있다" 면서도 "혹시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현상이 생길 지 몰라 자금팀들이 금융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고 말했다.

유통업체인 D사는 지난달 초 회사 보유 부동산을 모두 매물로 내놓은데 이어 최근 보유주식을 시장에서 매각하고 있다.

이 회사 崔모 부사장은 "회사의 자금지출은 대부분 7월 이후로 연기했으며 외상 매출금을 빨리 회수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고 말했다.

자금악화설이 나돈 쌍용그룹의 경우 유동성 확보를 위해 부동산 매각과는 별도로 코스닥 등록기업인 쌍용정보통신 주식(3천6백억원 상당)을 담보로 잡고 채권단으로부터 자금을 끌어쓰는 방안
을 모색 중이다.

또 쌍용양회 지분을 팔아 3억달러 정도의 외자를 유치하고 차입금을 줄이기 위해 쌍용양회의 세라믹.마그네트 사업 등을 분사할 계획이다.

◇ 자금 조달 길이 막혔다〓채권시장에서 삼성.LG.SK.롯데그룹 등 상대적으로 유동성이 풍부한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하면 자금을 끌어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난달 3년 만기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평균 9.91%였지만 이 정도 금리를 부담하며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들은 극소수다.

모기업 관계자는 "은행보증료와 발행비용에 회사채 인수처에 주는 뒷돈까지 감안하면 실제 이자부담은 13~14%에 이른다" 고 주장했다.

그나마 발행기간이 짧아져 3년짜리가 표준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1년짜리 회사채 발행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하반기 중 만기가 찾아오는 회사채는 총 31조3천억원 정도인데, 특히 7월(5조1천억원)과 12월(10조4백억원)에 만기가 몰려있어 차환발행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년에는 월평균 2조~3조원 정도의 만기가 찾아왔다.

E사 박모 사장은 "회사채 인수기관이 1백억원 짜리를 93억원선에 인수하는 등 할인하지 않으면 받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높은 이자부담을 감수하면서 발행하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CP도 연장이 안돼 6월을 제대로 넘길 지 걱정" 이라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싼 이자를 물면서 사채시장을 찾고 있다.

그러나 사채시장도 금융경색 현상이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자 큰손들이 자금을 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F그룹 모사장은 "자금이 급한 기업은 많은데 고금리를 준다고 해도 사채시장에서도 돈을 빌려주겠다는 전주를 찾기 힘들다" 면서 "꽤 탄탄했던 한 동창 기업인이 최근 급전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고 말했다.

지난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열린 재정경제부 이종구 금융정책 국장과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 모임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자금사정이 어려운 것으로 시장에 알려지면 곧 쓰러지기 때문에 회의 석상에선 모두 쉬쉬했다" 면서 "그러나 우리끼리 따로 이야기할 때 일부는 자금을 끌어댈 방법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고 말했다.

◇ 기업이 제시하는 해법〓대기업 재무담당 임원들은 최근의 금융경색은 제도적으로 풀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S그룹 최모 전무는 "은행들이 BIS만 따지다간 기업들이 모두 죽는다" 면서 "지급준비율(은행이 예금 지급에 대비해 중앙은행에 맡기는 금액의 비율)을 낮추는 등 방법으로 은행들이 실물부문으로 돈을 풀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고 말했다.

특히 최근 일고 있는 심리적 불안감이 확산할 경우 우량기업도 일시적인 자금부족으로 무너질 수 있다며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H그룹 박모 부회장은 "투신문제로 불거진 금융권 불신이 자금시장의 악순환으로 나타났다" 면서 "투신사 등 제2금융권과 은행권의 잠재 부실을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 정도의 추가 공적자금을 조성해 시장의 불신을 해소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I사 윤모 부사장은 "정부와 금융기관은 한계기업과 우량기업을 명확히 구분해 돈이 제대로 돌도록 해야 한다" 면서 "일부 문제가 되고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교통정리를 해야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량기업마저 일시적인 자금부족으로 도산할 우려가 높다" 고 지적했다.

K사 鄭모 사장은 "최근의 자금경색은 일부 기업에서 일시적으로 생길 수 있는 현상이지만 오래 지속될 경우 다른 기업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 면서 "금융권도 소문에 따라 여신을 회수하는 전근대적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을 제대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성숙해져야 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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