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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74> 한국의 여배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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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여배우 트로이카’하면 장미희·유지인·정윤희 세 배우가 떠오릅니다. 탁월한 외모와 연기력으로 1970년대를 풍미했죠. 60년대엔 문희·남정임·윤정희 등 ‘원조 트로이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에도 트로이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미몽’의 문예봉, ‘조선해협’의 김신재, ‘반도의 봄’의 김소영입니다. 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스크린을 수놓았던 한국의 여배우들을 알아봅니다. 11월 1∼30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여배우 열전’을 참고했습니다.

기선민 기자

1930~80년대 여배우 열전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의 기획전 ‘여배우 열전’에선 19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배우 42명의 대표작 42편이 상영된다. 한국 최초의 토키(유성)영화로 알려진 ‘춘향전’ 등에 출연한 문예봉의 ‘미몽’ ‘조선해협’부터 강수연이 주연한 91년작 ‘경마장 가는 길’까지 아울렀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시대별 여배우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모아 한국영화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영작과 일정은 영상자료원 홈페이지(www.koreafilm.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당 1회밖에 상영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문예봉(1917~99)

문예봉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해 나운규와 열연을 보여 주며 스타덤에 올랐다. 나운규가 연기한 뱃사공의 딸 역이었다. “조선의 이리에 다카코(入江たかこ·일본의 1세대 여배우)요, 조선의 뎃드리히(30년대 할리우드 섹스 심벌이었던 독일 출신 여배우 마를린 디트리히), 조선의 리샹란(李香蘭·일본 괴뢰정부 만주국 시절 여배우)”으로 불렸던 조선영화계 최고 스타였다.

문예봉이 주로 연기한 가난한 농촌여성은 당시 남성들의 누이이자 애인으로 조선여인의 원형이 됐다. ‘미몽’(1936)에선 남자를 위해 자식을 버리고 가출한 여인 역으로 출연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48년 월북해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 호칭을 받았고, 84년엔 ‘인민배우’가 됐다. ‘조선해협’(1943)은 그의 고전적 매력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 함께 출연한 ‘만년소녀’ 김신재, ‘반도의 봄’(1941) 주연 김소영은 문예봉과 더불어 식민지 시대 트로이카로 불린다.

김신재(1919~98)

최인규(1911∼?) 감독과 결혼한 뒤 남편의 권유로 ‘심청전’(1937)에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초창기 배우들이 극단에서 출발해 영화로 옮겨 오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영화 연기를 했다는 점이 특징. 단성사에서 개봉한 ‘심청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도생록’ ‘애련송’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커다란 눈동자와 덧니가 보이는 웃음 등 앳되고 청초한 이미지로 ‘만년소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국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고 전쟁통에 자식을 잃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가 피란지 부산에서 연 다방 ‘산유화’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다. ‘낙조’(1978), ‘장마’(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등 만년에도 연기를 계속했다.

최은희

최은희(1926∼ )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 18세에 연극 ‘청춘극장’의 하녀 역으로 무대에 섰다. 영화 데뷔작은 ‘새로운 맹서’(1947). 49년 ‘마음의 고향’에서 어린 동자승을 보면서 죽은 자식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 과부 역을 맡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한국적 고전미의 표상이 됐다면, 50년대 전후 허무주의와 퇴폐 풍조를 두드러지게 보여 준 ‘지옥화’(1958)에선 애인의 남동생을 유혹하는 양공주 소냐를 연기해 눈길을 모았다.

소냐는 ‘전후(戰後)’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apres-guerre)’에서 파생한 ‘아프레 걸’, 즉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로맨스 그레이’(1963)는 그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 준 대표적인 작품. 뽀글거리는 파마 머리를 하고 본처들이 자기 집에 쳐들어와 살림을 부수자 이에 맞서 싸우는 바 걸 역으로 도발적인 여성상을 보여 줬다. 남편 신상옥 감독과 출연작 120편의 대부분을 함께 찍었다.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 등을 연출한 여성감독 3호이기도 하다.

도금봉

도금봉(1930∼2009)

1957년 ‘황진이’ 주연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해외에 수출된 ‘황진이’로 영화배우로선 처음 대만에 진출하기도 했다. 63년 ‘새댁’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72년 ‘작은 꿈이 꽃필 때’와 74년 ‘토지’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욕망에 충실한 요부 혹은 삶에 집착하는 순박한 아낙 두 얼굴을 모두 소화해 내는 폭넓은 진폭의 연기자였다. ‘황진이’에선 풍만한 몸매와 요염한 마스크를 내세워 ‘세기의 요우(妖優)’로 불렸고, ‘또순이’에선 의지가 굳고 생활력 강한 함경도 여성을 표현해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파멸시키는 ‘월하의 공동묘지’의 식모 역은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녀로 꼽힌다. ‘젯트부인’(1967)에선 일수를 찍는 극성을 떨다 패가망신하는 주부 역을 맡았다. 똑같은 관능미를 풍겼지만 최은희가 정(靜)적이라면 도금봉은 동(動)적이었다. 97년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까지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문정숙

문정숙(1931~2000)

보성여학교 졸업 후 극단 아랑에 입단, 예술극회·신협을 거치며 명성을 얻었다. 스크린 데뷔작은 신상옥 감독의 ‘악야’(1952). 20대에는 ‘종각’ ‘흙’ ‘표류도’ 등에서 창녀, 댄서, 교사, 여대생, 미친 여자, 정숙한 부인, 억척스러운 아내 등 천의 얼굴을 보여 주며 연기 변신을 거듭했다. 30대에는 적극성과 개성을 띤 여주인공, 팜므 파탈(요부)로 통했다.

특히 그는 ‘만추’ ‘귀로’ ‘망각’ 등을 함께한 이만희 감독의 연인이자 페르소나로 불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만희는 ‘문정숙의 커리어는 이만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 감독이었다. 문정숙은 이에 힘입어 스타이기 전에 연기자로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다.

문희(1947∼ )

문희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친구 따라 KBS 탤런트 공채에 응시했다. 현장에 구경 온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이자 처조카였던 탤런트 양택조에게 ‘길거리 캐스팅’돼 65년 ‘흑맥’으로 데뷔했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주인공(신성일)을 감화시키는 청초한 여인 역이었다. 이후 ‘초우’ ‘잘 있거라 일본땅’ ‘무명초’를 찍으면서 ‘작은 몸매에 때묻지 않은 청순 가련한 이미지’는 이어졌다.

66년 정진우 감독의 ‘초우’, 68년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은 그가 남정임·윤정희와 함께 ‘1세대 트로이카’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218편에 출연, ‘동양 최고의 미녀 스타’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그는 71년 돌연 한국일보 부사장 고 장강재씨와 결혼했다. 73년 김기덕 감독의 ‘씻김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여배우 열전’에선 임권택 감독의 ‘법창을 울린 옥이’와 이만희 감독의 ‘원점’이 상영된다.

김지미

김지미(1940~ )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렸으니 당시 이 배우의 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57년 김기영 감독에게 캐스팅돼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에’(1958)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트로이카 배우들과는 구분되는 성숙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적 매력이 그의 무기였다. 6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배우 최무룡, 연하의 가수 나훈아 등과의 대형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한동안 공백기를 갖다 79년 ‘을화’로 컴백했고, 80년대 들어 임권택 감독과 ‘티켓’ ‘길소뜸’을 함께하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줬다. ‘토지’ ‘육체의 약속’ ‘길소뜸’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고은아(1946~ )

홍익대 공예과 재학 당시 정진우 감독 연출부에게 발탁돼 ‘난의 비가’(1965)로 데뷔했다. 가냘픈 몸매에 어딘지 슬픔이 느껴지는 마스크를 지닌 그는 이 영화에서 희귀병을 앓는 비련의 헤로인(heroine)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같은 해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에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과부 역을 맡으면서 연기세계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김수용 감독은 신인 고은아에게 여성 조감독인 나소원을 붙여 연기 지도를 하게 했다. 유순하고 소박한 한국적 여인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기 절정이던 67년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결혼한 이후 주로 ‘사모곡’ ‘은하의 계절’ ‘제2공화국’ 등 TV 드라마에 집중했다. 80년대 말 이후부터는 극장 경영자로 변신했다.

정윤희(1954~ )

정윤희

데뷔 당시 ‘뛰어난 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TV 드라마 ‘청실홍실’과 ‘나는 77번 아가씨’(1978)의 성공으로 ‘겨울여자’의 장미희,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유지인과 ‘신(新) 트로이카’로 불리게 된다. 세 명 모두 TBC 전속으로 영화배우를 겸업하며 영화 흥행과 시청률을 이끌었다. 정윤희는 70년대 산업화와 더불어 유행했던 소위 ‘호스티스 영화’ 계열인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비롯해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1979) 등에 잇따라 출연했다.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로 2년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연기력 논란을 잠재웠다. ‘백치미’로 일컬어지는 도톰한 입술과 커다란 눈빛, 육감적인 몸매 등으로 트로이카 중 가장 에로틱한 정서를 불러일으켰던 배우이기도 하다. 장미희·유지인이 지금까지 TV 드라마를 통해 명맥을 이어 오는 것과 달리 80년대 중반 결혼 후 거의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강수연(1966~ )

아역스타에서 청춘스타, 중견배우로 성장해 온 드문 여배우.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린이 월간지 ‘어깨동무’에 사진이 실리면서 연예계에 발을 디딘 그는 76년 영화 ‘핏줄’,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으로 아역 연기자가 됐다. 청춘스타로 변신한 건 ‘고래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에 출연하면서. 이후 ‘연산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대 안의 블루’ ‘씨받이’ ‘경마장 가는 길’ 등을 통해 전통적 여인상부터 고학력 여성까지 세련됨과 농염함 등이 공존하는 팔색조의 모습을 보여 줬다.

‘씨받이’로 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80년대 중반 원미경·이미숙·이보희 등 트로이카 체제가 결혼 등의 이유로 주춤하고 90년대 새로운 여배우 군단이 몰려오기까지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켰다.

※ 참고서적: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한국영화사』(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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