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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월가를 점령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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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종수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부소장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뉴욕에서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시위 한 달을 맞은 지난 15일엔 ‘국제 공동행동의 날’을 표방하며 전 세계적으로 80여 개국 9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이른바 ‘점령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점령 시위의 휘발성이 전 세계적으로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뉴욕에서 월가 점령 시위는 이제 일상이 되었고, 다른 나라에선 온갖 명목의 시위에 ‘점령하라’를 갖다 붙이는 게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주장하는 내용을 뜯어보면 나라마다 제각각이요,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일치된 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월가 점령 시위는 “상위 1% 부유층의 탐욕 때문에 나머지 99%의 사람들이 정당한 몫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며 그 대표적인 탐욕의 1%로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가들을 지목했다.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마드리드에선 높은 실업률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그리스에선 정부의 긴축정책과 복지비 삭감에 반대하는 시위가 ‘점령 시위’로 둔갑했다. 서울에선 소수의 전문 시위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에서부터 ‘반값 등록금 요구’와 ‘비정규직 철폐’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 주장을 ‘여의도를 점령하라’는 시위에 비벼 넣었다.

[일러스트=강일구]

 이러다 보니 시위의 성격 자체가 모호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는데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발전하는 이번 점령 시위의 양태에 주목해 그 자체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문가들도 나타났다. 월가 점령 시위가 특정한 이념이나 목표를 표방하지 않고 뚜렷한 리더도 없이 각자 다른 주장과 요구를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교환하면서 스스로 방향성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느슨하게 연관된 다양한 주장들이 가닥을 잡아가면서 정치 세력화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당 기간 동안 시위를 벌인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 옳다거나 사회가 반드시 거기에 반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시위의 방식이 새롭다고 해서 그 자체로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아프리카·아랍 지역에서의 반독재 민중봉기와는 달리 월가 점령 시위는 사회적인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 월가에 수천 명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미국사회 전체로 보면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의 점거 시위가 언론의 주목을 끌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미국민의 99%를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적극적인 지지나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월가 시위가 미국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동인(動因)이 되기 어려운 이유다. 언론에 비친 시위대의 주장은 ‘과잉 대표’의 혐의가 짙다. 우리나라에서 정당한 대표성을 부여받지 못한 시민단체들이 ‘시민’을 참칭(僭稱)해서 자신들의 편향된 주장을 펼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월가 시위가 장기적인 사회 변화의 동력을 갖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대안 없는 반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외치는 ‘반(反)금융자본’과 ‘반신자유주의’ 구호가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 일말의 심리적 대리만족을 줄지는 몰라도 일자리와 밥을 주진 못한다. 월가를 무너뜨리고, 1% 부자를 때려잡는다고 해서 나머지 99%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경제위기와 불평등을 불렀다고 단정짓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월가의 금융산업은 부자들의 돈도 굴려주지만 많은 미국 중산층의 일자리와 노후자금을 지켜주는 미국의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이며, 신자유주의는 레이건 정부 이후 미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과거 더 심한 적도 있었다. 물론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금융산업과 경제정책 방향이 바뀌어야 할 필요성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반대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무엇을 다시 세우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몇 사람이 모여 ‘반대’ 구호를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더구나 그 반대의 논거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거나 대안 없는 반대에 그친다면 그 주장의 정당성을 의심해 볼 만하다.

 어떤 곳을 ‘점령’하려면 치밀한 ‘통치’ 계획과 점령할 능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통치할 계획이 없거나 통치할 능력이 없는 ‘점령’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일 뿐이다. 통치는 책임을 전제로 한다. 통치 계획과 능력이 없는 점령은 무책임하다. 그런 점령은 지속될 수도 없고 지속할 가치도 없다. 월가의 점령 시위는 월가에 대한 통치 계획과 통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점령할 의사는 없이 그저 국민적 불만을 표출하는 심리적 카타르시스의 장(場)으로 삼는다면 혹시 모르겠다. 점령 시위의 원조인 월가 시위가 이럴진대 이를 베낀 ‘짝퉁 점령 시위’가 지속력을 갖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김종수 논설위원·경제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