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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8) 발목잡은 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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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의 용산·마포 지역구 후보로 나선 신성일(왼쪽에서 두 번째). 남궁원(왼쪽에서 세 번째)과 이덕화(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동료배우들이 그의 정치입문을 격려하고 있다. [중앙포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신아일보(현 정동극장 부근) 2층에 있던 한국국민당사로 들어갔다. 마침 김종철 총재가 그 곳에 있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작은아버지다. 김 총재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우리 신 동지가 왔습니다. 환영합니다.”

 “입당하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입당을 결정했다. 정치를 해야 한다면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민정당에서 전두환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도 싫었고, 민한당에서 노련한 정치인들의 들러리가 되기 싫었다. 제2야당인 한국국민당에서 열심히 해서 총재도 하고, 차후 대권까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김 총재는 “어느 지역을 맡고 싶느냐”고 물었다. 용산·마포 지역구를 맡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나는 고향 대구에서 3년을 준비해 선거에 나가려 했다. 하지만 10·26 정변으로 차질이 생겼다. 11대 총선이 1981년 3월 25일로 당겨진 것이다. 단기적으로 승부한다면 10대 총선에서 선거운동을 해보았던 용산·마포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민한당 조직차장이자 내 친구인 김현규가 우정을 베풀었다. 내 지역구가 용산·마포라는 것을 감안해, 그 지역 민한당 후보를 가장 늦게 공천했다. 맞상대로는 무게감이 떨어지는 철도청장 출신의 김재영을 내보냈다. 당시 중선거구제여서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명을 뽑았다. 2등만 해도 국회의원이 된다. TBC ‘뉴스전망대’ 앵커를 하며 인기가 높은 봉두완이 민정당 후보로 나왔다. 김현규는 내가 봉두완에게 지더라도 2등은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주위에서 “강신영(姜信永)이란 이름으로 나가면 어려울 텐데…”라는 말이 나왔다. 선거 45일쯤 남았을 무렵, 아는 변호사를 통해 개명 여부를 알아보았다. 한 달 내에 이름 바꾸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그 때만 해도 개명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간도 몇 달이 걸렸다. 조선일보의 주돈식 정치부장이 강신영이란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신성일’이라고 써넣으며 도우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내 약점을 간파한 봉두완은 합동유세전에서 ‘신성일’이란 이름을 집중적으로 띄웠다. 투표용지에는 호적상의 이름인 ‘강신영’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선거에서 ‘신성일’은 유령인 셈이다. 추첨을 통해 내가 기호 4번, 봉두완이 5번을 받았다. 내 선거조직도 만만치 않게 컸다. 선거비용이 하염없이 들어갔다. 65년부터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에 당좌수표 를 갖고 있던 나는 선거 다음 날인 3월 26일자로 된 수표를 남발하며 자금을 조달했다. 죄다 3월 26일 갚아야 하는 빚이다.

 개표 결과는 참담했다. 봉두완은 15만 8000표로 전국 최다 득표의 주인공이 됐다. 김재영은 7만 8000표로 2등을 했고, 나는 5만 1000표로 탈락했다. 내가 10년 동안 다니던 남산체육관 스낵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선거 다음 날 아침에도 꿋꿋하게 운동하러 갔더니, 그 아주머니는 “신 선생은 어디로 출마했어요? 이름이 없던데요”라고 했다. 정말 뼈저린 아픔이었다. 11대 선거 다음 날인 3월 26일,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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