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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한반도의 뇌관’ 人間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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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절반을 통치하고 있는 북한 최고권력자 김정일.

그 김정일이 6월12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장에서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과 대좌한다.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역사적 대 담판에서 한쪽 키를 움켜쥐고 있는 그는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겐 베일 속의 인물이다. ‘예측불허의 괴팍한 인물’에서 ‘총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까지 양극단으로 엇갈리는 평가마저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어서 그의 진면목이 더욱 궁금하다. 남북정상회담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월간중앙”은 그동안 김정일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성격, 생활, 가족, 권력구도까지 그의 실체를 철저히 분석한다. 필자인 정창현 기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선택한 연구서 중 하나인 “곁에서 본 김정일(99년4월 출간)
”의 저자로, 김정일에 관한 국내 최고 전문가다.

1998년 10월30일 밤 10시25분. 김정일(金正日)
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은 김용순(金容淳)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송호경(宋浩景)
아태위 부위원장을 대동하고 백화원초대소를 예고없이 방문했다.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6년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을 한밤중에 예고없이 만난 것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면담시간은 35분. 김총비서는 정회장에게 “나는 시작만 하면 빨리빨리 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나는 빨리 되는 줄 알았는데 왜 늦었느냐”며 현대가 추진하고자 하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재촉했다. 면담이 끝난 후 김총비서는 “명예회장님이 나이가 드신 윗분이기 때문에 가운데 모시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서 정회장을 가운데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도해도 되느냐”고 묻자 “공산당 당수 만나서 사진 찍은 것이 보안법에 안걸리느냐”는 여유까지 보였다.

판문점으로 돌아온 정회장은 “김위원장이 나를 어른으로 잘 대접해 줘 무척 고마웠다”며 김총비서에 대해 “논리가 정연하고 활발하다”고 평했다.

이날 두사람의 만남은 남북 경협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 외에도 우리에게 ‘과연 김정일 총비서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하나 더 던졌다. 이날 그가 보여준 김총비서의 모습은 ‘대인기피증을 가진 괴팍한 인물’이라는 통념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잘못 알려진 김총비서의 실체

그로부터 5개월 후인 지난해 3월24일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부의 국정개혁 보고회의에서 “북한 김정일을 다시 보라”는 다소 뜻밖의 발언을 했다. 그동안 김정일 총비서에 대한 평가가 잘못됐으니 이제는 그의 실체를 제대로 봐야 한다는 지시였다.

이같은 평가가 새삼스럽거나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1990년 10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당시 김일성 주석, 김정일 총비서 등과 회담했던 서동권(徐東權)
안기부장이 “김정일은 우리 사회에 알려진 보편적 상식과 달리 지도자로서 상당한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대부분의 북한전문가들은 짧으면 3일, 길어도 3년이면 북한체제가 붕괴한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1997년 10월 김총비서가 노동당 총비서에 공식 취임한 지 3년여가 지난 지금도 그는 건재하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일까? 남북정상회담이 한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 물음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로 다가왔다.
신장 165cm, 체중 80kg, 고수머리, 두꺼운 금테안경이나 짙은 선글라스 착용, 인민복이나 간편복 차림, 굽이 높은 구두.

그동안 북한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드러난 김정일 총비서의 외견상의 모습이다. 지난해 11월20일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김정일 총비서가 “담배를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흡연은 명백히 건강에 해롭다”고 말했다고 보도해 김총비서가 담배를 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최근 “노동신문”에 실리는 김총비서의 사진을 보면 살이 조금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부터 표정도 조금 밝아졌다.
정주영 회장과 동행했던 여동생 정희영씨는 김총비서의 첫인상에 대해 “중년의 나이에 다소 살이 쪄보이기는 했지만 건강미가 넘쳤다. 씩씩한 모습에 털털한 성격이었다”며 “얼른 보기에 키가 다소 작은 편이었지만 풍채가 좋아 작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 소문처럼 말을 더듬거리거나 건강이 안좋아 얼굴빛이 검게 보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은 김총비서가 1964년 6월 당사업을 시작한 때부터 지난해 6월까지 35년간 3,900여일에 걸쳐 7,400여 단위의 각급 당기관들과 혁명사적지, 군부대, 공장·기업소, 협동농장, 과학·교육·보건·출판보도기관들을 현지지도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1년에 평균 111일, 211개 단위를 지도한 셈이다.

최근 “김총비서가 평양을 거의 비워 놓고 있다”는 한 북한 방문자의 말이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김총비서를 꼭닮은 가짜 김정일이 두사람 더 있다는 루머는 그래서 나도는 듯하다. 지난해 10월 재방북한 정주영 회장도 평양이 아닌 함흥에서 김총비서를 만났다.

정확하고 솔직한 보고 좋아해

그러나 이런 공개된 모습 외에 김총비서의 사생활이나 성격 등은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 있다. 북한 안에서도 김총비서의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절대 금기로 돼 있다. 따라서 김총비서를 탐구하는 작업은 한번이라도 그를 직접 만나보았거나 지켜본 전 평양 주재 옛 소련 외교관과 특파원, 옛소련 공산당 고위간부들, 북한 고위층에 있다 귀순한 인물들의 증언을 상호 비교해 모자이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김총비서는 평소 평양의 중심부인 중구역 노동당 제1호 청사 내에 있는 총비서 집무실에서 일을 처리한다. 그를 보좌하고 경호하는 서기실(비서실)
, 당중앙위 참사실, 부관실 등이 1호 청사에 모여 있다. 1호 청사 남서쪽에 인접해 있는 2호 청사는 당중앙위 직속 전문부서들이 자리잡고 있고, 북서쪽 모란봉 너머에 대남부서들만 따로 독립해 3호 청사에 자리잡고 있다. 각 부서에는 김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하는 문건을 작성하는 ‘1호 문서작성자’들이 있어 그날그날의 현안을 정리한다.

김총비서는 무엇보다 정확하고 솔직한 보고,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정보를 선호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 한 귀순자는 “1988년 봄 총비서 집무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김총비서가 계응태 당비서와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등에게 국가안전보위부가 당중앙에 사실을 정확히 보고하지 않는다고 나무란 일이 있다”며 김총비서가 “나는 정확,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총비서는 현장확인을 즐기는 편이다. 지시한 사항이 지방단위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1주일에 1∼2일 외에는 주로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1970년대초 선전선동부 간부로 있으면서 김총비서(당시 선전선동부 부부장)
와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신경완(申敬完·1998년 사망)
씨는 김총비서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 결재받기가 대단히 어려웠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김정일과 같은 부서에 있으면서 결재를 받을 때마다 고생을 많이 했다. 언제 출근하는지, 언제 퇴근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혁명가극을 만들 때 마지막에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한번은 대극장에 있다고 해서 가보니 배우들의 노래를 열중해서 듣고 있었다. 옆에서 무슨 일 때문에 왔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노래가 다 끝나고 업무를 얘기하자 ‘언제 왔습니까? 왔으면 일찍 얘기할 것이지. 괜히 기다렸습니다’라고 했다. 똑같은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김총비서가 ‘야행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낮에는 주로 실무지도를 다니고, 밤에는 문건이나 비준(결재)
해야 할 서류를 검토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실무자를 부르거나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외교관으로 있다 귀순한 고영환씨는 “김정일이 밤 11시에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 업무지시를 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김정일은 일을 처리할 때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고 기상천외하게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듯 처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밤늦게 실무부서에 전화해 업무를 확인하고 지시까지 하는 김총비서의 일 처리방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김총비서는 주로 밤 늦게 동평양 대동강구역의 의암동에 있는 사택으로 퇴근한다. 그는 현재 1973년 9월에 재혼한 김영숙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김총비서는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경 김일성대학 동기생인 홍일천과 결혼해 중구역 중성동에 있는 노동자아파트로 분가했다. 그러다 김총비서가 1967년 중앙당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현재의 청년공원 건너편인 창전동으로 이사했다. 1968년경 여기서 김총비서는 홍일천과 사이에 첫딸인 김혜경을 낳았고, 얼마 후 이혼했다.

재혼한 처와 의암동 사택에 거주

홍일천의 정치활동을 둘러싼 견해차이가 원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계모인 김성애가 1960년대 후반 정치일선에 나서서 위세를 부려 자신과 충돌했던 경험을 가진 김총비서는 부인의 정치활동을 극력 반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97년 “중앙일보”가 후원한 베이징 남북통일학술회의에 참가한 한 김형직사범대 교수는 “홍일천 학장이 김정일 총비서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정색을 하며 “그것은 남조선의 모략선전극”이라고 완강히 부인했다.
신경완씨는 “김정일이 대학 졸업후 결혼한 것은 분명하며, 1969년경에 그가 혼자 생활한다는 사실이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간부들 사이에 알려졌다”고 말했다. 김총비서는 1973년 9월 조직비서가 된 후 현재의 부인인 김영숙과 재혼해 서장동에 있는 당간부 사택에 거주하다 1970년대 후반에 현재의 의암동 사택으로 이사했다.

1978년 북한에 납치됐다 1986년에 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崔銀姬)
씨는 외부인사로는 유일하게 이 집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데, 동평양에 있는 단층 양옥집이라고 기억했다. 김총비서가 아들 김정남과 같이 생활했다는 이한영을 비롯한 일부 귀순자들은 김총비서가 김영숙과 생활하면서도 중성동에서 영화배우 출신의 성혜림, 창광동에서 일본 출신의 무용수 고영희 등과 동거했다고 증언했지만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다.
김총비서가 홍일천과 살았다는 창광동 33호 관저, 성혜림과 동거했다는 중성동 15호 관저, 고영희와 살았다는 서장동 관저와 창광동 26호 관저는 모두 김총비서가 총리관저에서 분가후 지금의 의암동 사택으로 이사올 때까지 거주했던 곳을 지칭하는데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영희가 살고 있다는 창광동 26호 관저는 김총비서의 여동생인 김경희(金敬姬)
·장성택(張成澤)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이다. 1972년 소련 유학에서 돌아온 김경희 부부가 김총비서의 첫딸인 김혜경을 데려다 키웠는데, 손녀딸을 귀여워한 김일성 주석이 이곳을 자주 찾자 집을 수리,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총비서는 2남2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결혼한 홍일천과의 사이에 김혜경이란 딸이 있고, 성혜림과의 사이에 김정남이라는 아들, 김영숙과의 사이에 김설송과 김정철이란 아들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다만 신경완씨는 “1970년대에 김정남의 생일잔치에 몇차례 참석했다”며 김정남이 성혜림의 아들이라는 통설을 부정하고 김정남과 김설송이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김총비서가 노동당 1호 청사에 첫 출근한 것은 1964년 4월21일이고 6월19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각을 담당하는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에 있다가 종합지도과로 자리를 옮겼다. 2년 후에는 중앙지도과 책임지도원으로 승진했다. 김총비서는 한쪽으로는 김일성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처 업무도 관장했다.

김정일 부인 모습 드러낼까?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김정일 총비서와 부부동반으로 만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무산된 정상회담의 경우, 김대통령은 당시 김주석이 후처이기는 하지만 김성애 전 여맹위원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 손명순 여사의 동행을 추진했다. 김성애는 1994년 카터 방북 때 20여년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총비서의 경우 아직까지 부인이 함께 동행한 모습을 공개한 적이 없어 이번 정상회담 때 부인이 공개석상에 나올지 불투명하다.

김총비서는 1965년경 김일성종합대학 동기생인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으나 4년 후인 1969년경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의 정치활동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홍일천은 현재 김형직 사범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원, 남북고위급회담 남북사회문화교류협력공동위원회 위원 등의 직함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김은 1973년 노동당 조직비서가 된 직후 김영숙과 재혼했다. 전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었던 신경완(1998년 사망)
씨는 김총비서가 “1973년 10월10일 당·정·군의 원로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했고, 다음해에 이 사실이 노동당 내에 알려졌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김비서가 1974년 1월 노동당 부부장급 이상 간부들을 자신의 사택으로 초청해 신년모임을 갖고 처음 재혼한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덧붙였다. 김영숙은 청진공산대학 부학장의 딸로, 결혼전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등록과 등기원으로 있다가 김총비서의 눈에 들어 전격 결혼했다고 한다.

신씨는 “김영숙이 말단 등기원에서 김의 결혼상대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전적으로 김정일의 결정이었다”며 당시 노동당 간부들 사이에 회자됐던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이야기했다. “김정일은 1973년 조직비서가 된 후 빨치산 원로들로부터 재혼 압력을 받았다. 압력이 거세지자 김은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던 서윤석에게 중앙당에 근무하는 모든 여직원의 이력카드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당시 중앙당에 있던 여직원은 200여명이었는데, 미혼은 40명 정도였다. 김은 이력카드를 넘겨보다 김영숙을 가리키며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김은 1973년 봄 당회의를 준비할 때 차를 들고 오는 김영숙과 부딪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그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김총비서는 한때 영화배우 성혜림,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영희 등과 동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식확인되지는 않았다. 김총비서는 김영숙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금까지 김총비서의 부인을 보았다는 외부인사는 1978년 북한에 납치됐다 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유일하다. 최는 평양 대동강구역 의암동에 있는 김정일 사택으로 초청받아 갔을 때 김의 부인을 만났다. “김정일의 부인은 163㎝ 정도의 키에 약간 볼륨있는 체격으로, 얼굴은 둥글고 잘생긴 편이었다. 부풀려 올린 퍼머머리에 검정색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홈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김정일보다 두세살쯤 아래로 보였다.”

이외에도 드물지만 멀리서나마 김영숙을 본 적이 있는 귀순자가 있다. 1990년대 중반 귀순한 전 온성군 상업관리소장 이순옥씨는 “1974년경 김영숙과 함께 온성에 있는 왕재산혁명사적지 건설현장을 방문했다”며 “당시 김영숙은 긴 머리였으며 열차에서는 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귀순한 인민군 장교 출신의 정모씨도 “1990년대 중반 김정일 총비서가 부대를 방문했을 때 부인과 아들을 동행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이 공개하지는 않지만 김총비서가 지방이나 군 현지지도 때 부인을 동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희호 여사의 평양 방문이 실무협의에서 합의될 경우 김총비서의 부인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이희호 여사의 동반 방문을 추진하기 위해 실무협의에서 북측의 의사를 타진할 계획이지만 무리하게 추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위원 맡으며 통치체제 구축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북한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부서다. 그중에서도 내각과 내각 산하 각 중앙기관,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 등 행정기구를 직접 지도하는 중앙지도과와 인민무력부, 인민군 총정치국 등을 관장하는 종합지도과가 가장 중요한 부서다. 당 우위의 사회인 북한에서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파워는 막강하다. 김총비서가 처음 근무한 중앙지도과 지도원의 경우 내각 산하 기구의 당위원회 비서, 내각 상(장관)
, 부상(차관)
급을 상대하며 국장급은 상대도 하지 않을 정도다.
그후 그는 선전선동부 과장을 거쳐 문화예술 담당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 등 이른바 북한의 ‘5대 혁명가극’을 만들어 ‘혁명1세대’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얻었다. 김총비서는 노동당의 양대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사실상 장악해 1970년대 초반 이미 권력핵심의 강력한 실권자로 떠올랐다. 문화예술 부문 종사들 사이에서 ‘영명한 지도자’ ‘친애하는 지도자’라는 호칭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3년 9월 김총비서는 조직과 선전 담당 비서로 임명됐다. 다음해 2월 김총비서는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부상했다. 정치위원, 조직 담당 비서와 조직지도부장, 선전 담당 비서와 선전선동부장이라는 1인5역의 중책을 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김총비서는 후계자로 공식화되자마자 본격적으로 자신의 통치체제를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1973년 하반기부터 1976년 중반기까지 3년간에 걸쳐 노동당, 군대, 정부, 대남사업의 순서로 후계체제가 확립돼 나갔다. 당시 3호 청사에 있었던 신경완씨의 증언.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한 후 1974년에는 지도이론과 방침을 작성, 수립했으며, 75∼76년에는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지도, 강습에 나섰다. 특히 1974년 말부터 75년 중반까지 김정일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여기에 나타났다 저기에 나타났다 하는 식으로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심지어 양강도 산골에까지 모습을 드러내며 후계체제 확립을 쉴새없이 다그쳤다. 그러느라 김정일은 기차·비행기 안에서 수면을 취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1975∼76년에는 각종 회의와 강습을 주재하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무렵 김총비서가 주도하던 검열사업이 북한 사회 전역에 몰아쳤다. 후계체제에 저항하는 간부들은 여지없이 지방으로 쫓겨가거나 숙청됐다. 이와 관련, 1970년대 초에 신설된 국가보위부가 이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당·정·군에 대한 개편이 완결된 후 소집된 1980년 10월10일 제6차 당대회는 김총비서를 위한 대회였다. 이날 김총비서는 주석단 맨 앞줄 왼쪽 끝에 자리잡았으며 대회 집행부 명단상으로는 김일성·김일·이종옥·오진우에 이어 다섯번째였다. 당대회 마지막 날인 10월14일에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원, 당비서, 군사위원으로 선출됐다. 정치국·비서국·군사위원회의 모든 지위에 임명된 유일한 경우였다. 1970년대에 ‘당중앙’이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불리던 김총비서가 6차 당 대회를 통해 후계체제를 완성하고 마침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성격 두고 평가 엇갈려

이 시기 김총비서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1985년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미하일 슈브니코프가 소련 당중앙위원회에 제출한 극비보고서의 내용이 주목된다.
이 보고서는 ‘김정일이 당 정치국원의 인사에까지 거의 전권을 행사하는 등 이미 당, 국가의 인사권을 포함한 국가정책 전반에 걸쳐 지휘감독권을 행사해 사실상 후계자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김총비서의 건강에 대해서도 언급, ‘김일성 일가 모두 신장결석에 잘 걸리는 체질로, 김정일도 만성적인 신장결석에 시달리고 있으나 그 이상의 질환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때부터 17년만인 1997년 10월 그는 당총비서에 취임해 북한에 명실상부한 ‘김정일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능력과 성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1997년 망명한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黃長燁)
씨는 그를 ‘위험한 인물’ ‘통치능력이 떨어지는 지도자’로 묘사했다.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직후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김정일은 머리가 아주 좋으나 따뜻한 인간성이나 어떤 행위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총비서의 성향에 대해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이 신상옥·최은희 부부에 대한 심문을 통해 얻어낸 분석자료가 주목된다. 이 보고서는 “김정일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과 찬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랑꾼”이며 “쉽게 모욕감을 느끼고, 자기에 대한 무례나 비판으로 생각되면 화를 내면서 반응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반대하려 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일본 “산케이(山經)
신문” 논설위원장 시바타 미노루는 “수수께끼의 북조선”이란 저서에서 김총비서에 대해 ‘천성이 난폭한 반면 도량이 넓으며, 주민에게는 겸손한 체하나 측근에게는 오만하고, 머리가 좋고 결단력은 있으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세며, 일단 결심하면 부작용이 있어도 밀고나간다’고 묘사했다.
상반되는 주장도 있다.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서대숙 소장은 “김정일은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난폭하고 예측불가능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1982∼87년 소련 외무차관 시절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김총비서를 여러 차례 만난 러시아의 미하일 카피차는 1990년 기자회견에서 김총비서에 대해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며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좋은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인간관계를 잘 처리할 줄 안다. 한번은 만찬회에서 만났는데 김정일은 자유롭게 행동했다.소박하고 착하게 그리고 허물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옷도 소박하게 입었다. 자주 웃었으며 농담을 좋아했다.키는 크지 않지만 힘이 세고 몸집이 좋으며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고 밝힌 바 있다.

김총비서가 내성적이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그동안의 보도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평양 특파원을 지낸 폴란드 언론인 다레비치도 ‘김정일이 플레이보이, 술주정꾼,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란 서방측의 인물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서방세계는 근본적으로 김정일을 악마의 초상화로 그리는 데 익숙해 있다”며 “주석궁을 자주 출입하는 중국인이나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류의 혹평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버지 의식 대외활동 의도적으로 기피

김총비서와 접촉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김정일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후계자로 지정된 후 25년 이상 북한을 실질적으로 장악, 통치해 온 점도 아울러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총비서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대인기피증’이 많이 거론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사담(私談)
을 즐겨하면서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제대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김총비서의 공식 군중연설은 1992년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조선인민군 장병에 영광 있으라”고 발언한 것이 유일하다.

일부 김총비서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은 “김정일이 간부들과의 토론이나 회의석상에서 유머와 재치를 보이는 등 말솜씨가 있었다”며 “김일성이 주석으로 있을 때는 ‘하늘 아래 두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김정일 스스로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자제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다레비치는 김총비서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김정일이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얌전한 이미지를 주려고 했으며,‘하나의 별만이 세상을 밝힌다’는 북한의 지배논리에 따라 아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총비서가 ‘은둔의 지도자상’을 벗고 대외활동을 본격화할지는 이번 ‘6·12 남북정상회담’이 큰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총비서의 취미와 특기 등은 유별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선전물은 그가 예술분야, 특히 영화와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선전한다. 김총비서가 ‘영화광’이라는 사실은 모든 언론이 그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단골메뉴다. 최은희씨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김정일은 대단한 영화광이다. 김정일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는 영화문헌 창고에는 세계 각국의 영화 1만5,000편이 소장되어 있으며, 녹음성우·번역사·녹음기사 등 관계직원들만 250여명에 이른다. 김정일은 북한 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서 북한의 어떤 현역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보다 앞선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
최씨는 “가극 ‘피바다’의 경우 거기에 사용할 곡으로 2,000곡을 작곡시킨 다음 그중에서 김정일이 직접 수십곡을 골라 최종연습시켰다”는 사례를 들어 김총비서가 연극·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상당한 소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민적’ 이미지 창출에 특히 신경

김총비서가 즐기는 취미와 운동은 수영·사우나·사냥·낚시·승마·테니스·자동차운전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빨치산 세대와는 크게 다른 취미의 일면을 보여준다. 김일성대학 재학 시절부터 시작한 승마는 한달에 한번 정도 호위사령부 소속 평양기마사에서 연습한다고 한다. 테니스는 초보 수준이라는 것이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김총비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 사냥이다. 이는 그의 특기 중 하나가 사격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사격 실력은 수준급이라고 정평나 있다. 신경완씨는 김총비서의 사격술이 뛰어나 “보통 30점 만점에 29점이나 30점을 명중시켰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장군님은 명사수 우린 명중탄’이라는 찬양 노래까지 지어 선전하고 있다. 그는 현지지도 나갈 때나 주말 등을 이용해 평안북도 연풍수렵장과 황해남도 신천의 전용 수렵장에서 꿩·토끼·사슴·노루 등 짐승 사냥을 즐긴다고 한다.

김총비서의 취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동차 운전이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처음 핸들을 잡기 시작한 그는 틈만 나면 차를 몰고 평양 시내를 질주했다. 사고도 여러 차례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총비서가 직접 운전하는 것을 몇차례 목격했다는 신경완씨는 “1975년 여름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벤츠 600을 몰고 가다 전신주를 들이받은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1977년 초봄 평양시 중구역 창전동 네거리에서 역시 벤츠 600을 몰고 가다 트럭과 정면충돌해 경상을 입고 김일성 부자의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2주 가량 치료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몇년전 미국의 한 해외교포는 김총비서가 직접 운전하고 나온 차를 탄 경험이 있다고 한다. 파격을 즐기는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밖에 각국의 첨단 제품 또는 최우수 상품 등을 마구 사들이는 버릇도 김총비서의 취미라면 취미라고 할 수 있다. 김총비서와 오랜 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러시아의 외교관 출신 트카첸코의 말에 따르면 그의 서재에는 전자수첩·컴퓨터·전자오르간·전축 등 일본·미국·프랑스 등 각국의 첨단 전자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고 한다. 트카첸코는 이것을 김총비서가 첨단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고 항상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지난해 김총비서는 “컴퓨터를 안하면 무지몽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컴퓨터 산업에 주력하라”고 지시한 후 자신도 인터넷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김총비서가 하루 두시간 넘게 웹서핑을 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사업 개발을 지시했다”는 북한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1997년 10월4일 외국관리로서는 10년만에 김총비서를 만나 회담한 옛 소련 공산당그룹의 올레그 셰닌 의장은 “김정일이 러시아 사정을 비롯, 국제정세에 밝은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김총비서는 전형적인 한국음식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좋아하는 육류는 불고기와 단고기(개고기)
및 내장탕 등이며 생선탕도 즐기는 편이다. 과일은 중앙당과 호위국이 관리하는 특별온실에서 재배한 딸기·수박·토마토 등을 먹는다고 한다. 북한 방송은 김총비서의 18번이 ‘김일성장군의 노래’이고 붉은 색을 좋아한다고 선전한다. 신경완씨는 김총비서가 김일성 주석의 18번이었던 ‘사향가’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강성산 전 북한 총리의 사위 강명도씨는 김총비서의 개인취향과 관련, “김정일은 말 타는 것을 좋아한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수십만달러짜리 말을 사들여 타곤 한다. 또 사격이 취미다. 전에는 ‘헤네시 코냑’을 주로 마셨으나 지금은 위스키를 많이 마신다. 술 때문에 췌장이 나쁘다. 담배도 줄담배다. 머리도 좋은 편이다. 다만 성격이 아주 괴팍하고 급하다. 무절제한 김정일의 생활상은 1985년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다. 기쁨조도 줄이고 곳곳에 있던 특각도 축소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김일성이 뒤로 물러나면서 김정일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천건을 비준(결재)
해야 한다. 때문에 김정일은 오전 1∼2시까지 업무를 보는 것은 물론 집무실에는 항상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김총비서는 늘 자신이 ‘인민적’이라는 이미지 창출에 신경쓰고 있다. 북한 방송은 지난해 10월18일 김총비서가 1996년 1월 중순 당간부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끝없이 번영할 우리 사회주의 조국, 그 품속에서 더욱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누릴 민중의 모습을 그리며 그 어떤 난관도 달게 여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김총비서는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는 것이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선호하는 ‘밀실정치’와 그 측근들

김총비서가 늘 간편복(점퍼)
을 입는 것도 고도의 자기연출이라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실 대외적으로 공개된 모습에서 김총비서가 정장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김총비서가 양복을 입은 모습이 그의 50회 생일인 1992년에 공개돼 화제가 된 일이 있다.
한 귀순자는 “점퍼는 ‘혁명하던’ 시대 사람들의 옷이다. 전투적인 옷이다. 김정일은 자신이 ‘혁명전사’라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또 점퍼는 ‘인민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소박하게 보인다. 김일성도 김정일이 소박하게 보이는 모습을 칭찬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6월12일 열릴 남북정상회담 때 그가 어떤 복장으로 나올지도 흥미거리다.

김총비서가 파티를 즐긴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총비서가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알콜에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파티는 업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자기 사람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잘 알려진 김총비서의 비밀파티도 후계자로 지명된 1974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당·정·군 전반에 걸쳐 김정일 사람들이 포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면 비밀파티는 넓은 의미에서 김정일의 용인술 중 하나인 셈이다. 김총비서의 이복동생인 김평일(金平一·현 핀란드 대사)
은 1994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총비서의 음주에 대해 “공식적인 파티 등에서 매우 한정적으로 술을 마실 뿐”이라며 “술을 과음하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김총비서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의존하는 ‘밀실정치’를 선호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가 지방이나 공장·협동농장에 ‘현지지도’를 나갈 때 보면 일부 측근들만 계속 동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쪽에서는 당비서 4인방과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4인방이 김정일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김기남(사상담당)
· 김국태(간부담당)
· 김용순(통일전선사업담당)
·최태복(교육담당)
비서와 장성택(조직)
·이용철(군사)
·박송봉(군수)
·최춘황(선전)
제1부부장이 그들이다.
군쪽에서는 군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는 조명록(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영춘(인민군 총참모장)
·김일철(인민무력상)
·이용무(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차수·총정치국의 쌍두마차인 현철해(조직담당 부국장)
·박재경(선전담당 부국장)
대장, 이명수(작전국장)
상장 등을 들 수 있다.

김총비서는 지난 4월 이들 군 최고 실세들을 모두 대동하고 평양에 있는 군 자동화대학을 방문해 군부의 지지가 확고함을 과시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김총비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김형철 책임부관과 군부대 방문 때 호위임무를 전담하는 원응희 군 보위사령관도 빼놓을 수 없는 측근이다.
이렇게 김총비서가 당과 군의 일부 간부들만 데리고 다니는 것을 ‘측근정치’ ‘밀실정치’라고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체제위기에 봉착하자 김총비서는 즉각 ‘비상관리체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대를 비롯, 지방 현지지도를 나갈 때면 당·군·대남분야의 현안을 그때그때 보고받고 즉각적으로 결정사항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최고담당자들을 항상 동행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김정일시대’를 이끌어 나갈 북한의 파워엘리트들은 지난 1998년 9월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에서 단행된 권력구조 개편과 인사조치를 통해 가시화됐다. 이 회의에서 북한은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김총비서를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함으로써 권력승계를 공식 마무리했다.

경제난 해결 위해 실무형 중용

권력구조면에서 주목할 점은 ‘권력의 분산과 이중성’을 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김총비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으면서도 제도상으로는 대외적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내 행정 전반의 최고책임자인 내각 총리 등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한마디로 국방은 국방위원회가, 외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내정은 내각이 맡는 권력분산이 이뤄졌다.
국가기관의 개편에 따라 대대적인 인사이동도 뒤따랐다. 먼저 최고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국방위원회는 위원장에 김정일, 제1부위원장 조명록, 부위원장 김일철·이용무가 선출됐다. 위원에는 김영춘, 연형묵(자강도당 책임비서)
, 이을설(호위사령관)
원수, 백학림(인민보안상)
차수, 전병호 비서, 김철만 차수가 임명됐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에는 최태복 비서, 부의장에는 장철(전 부총리)
과 여연구(전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가 선출됐다. 대외적으로 국가수반 역할을 맡게 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영남(전 부총리 겸 외교부장)
, 부위원장에는 양형섭(전 최고인민회의 의장)
과 김영대(사회민주당 중앙위원)
, 서기장에는 김윤혁(전 부총리)
이 각각 선출됐다.

과거 정무원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권한이 확대되고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경제분야 32개 부서를 23개(후에 2개 부서 신설)
로 통폐합했다. 실무 전문관료를 중심으로 진용이 짜여진 ‘경제내각’의 성격이 뚜렷하다. 관심을 모았던 내각 총리에는 홍성남 부총리가 승진했다. 부총리에는 채취공업부장 조창덕과 기계공업부장 곽범기가 승진, 임명됐다. 두사람은 각각 탄광과 공장의 노동자로 출발해 기사·직장장·기사장·지배인을 거쳐 정무원 부장으로 발탁됐다가 부총리로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김총비서는 인사조치를 통해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김총비서는 1970년대 중반 이래 ‘간부배합’정책을 중시해 노년­중년­청년의 배합, 빨치산 출신-혁명유자녀 출신­비유자녀 출신의 배합 등을 기본틀로 삼아왔다. 이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전문성 있는 관료들로 물갈이를 단행한 것이다.
혁명1세대들은 백학림·이을설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명예직을 맡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대중단체들의 책임자들은 70대에서 50∼60대로 전원 교체돼 10년 이상 젊어졌다. 특히 김정일은 당과 군에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빨치산 2세대’들을 중용했고, 내각에는 경제난 해결을 위해 전문지식이 있는 ‘실무형’으로 교체했다.

그중에서도 조직지도부 인맥의 급부상이 눈에 띈다. 최근 몇년 사이 도당 책임비서로 임명된 김운기(황해남도)
·김평해(평안북도)
·이수길(양강도)
·리태남(함경남도)
등은 김정일이 1964년 조직지도부에 들어갔을 때 보조지도원으로 당에 들어와 그를 보좌했던 직계들이다.
1996년 이래 심각해진 식량난 이후 흐트러진 지방당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하겠다는 김정일의 의도가 엿보인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에 임명된 이일환은 ‘빨치산 3세대’(빨치산 김명화의 외손자)
의 선두주자로 향후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 주목되는 인물이다.
권력구조 개편과 인사조치를 단행한 직후 김총비서는 ‘강성대국 건설’을 내세우며 대대적으로 ‘경제살리기’에 나섰다. 1998년 10월10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당창건 53년을 기념하는 사설에서 북한이 ‘사상과 군사의 강국’으로 자라났다면서 앞으로는 ‘경제의 강국 건설’에 주력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쳤다.

‘경제총사령관’ 이미지 변신 시도

이보다 앞선 10월1일 김총비서는 양강도 대홍단군 현지지도를 통해 대홍단군의 주요 농작물인 감자 농사, 축산업, 농업기계화, 국토관리 부문 등 경제분야에서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 이후 김총비서는 군부대 방문을 꾸준히 지속하면서도 자강도·강원도·평안북도·함경북도 지역의 경제부문을 직접 방문해 전력과 식량 증산을 독려했다. 인민군 총사령관에서 ‘경제총사령관’으로의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월 첫 현지지도 장소로 국가과학원을 방문한 것도 과학기술 입국과 경제회생에 쏟고 있는 김총비서의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김총비서가 ‘살아남기’에서 ‘잘 살아보세’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는 징후가 북한 전사회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해외자본을 적극 유치하기 위해 나진·선봉지구에 이어 조만간 신의주·남포지역을 경제특구로 선포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호응해온 데서도 경제 재건을 위한 북한의 실리추구를 잘 읽을 수 있다.

북한은 당과 국가보다 김정일 총비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제다. 그만큼 김총비서의 지시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북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는 김총비서의 변화가 곧 북한사회 전체의 변화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총비서와 북한이 전면적인 개방정책으로 나올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그런 점에서 김총비서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정창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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