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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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에 발을 딛자마자 체는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량이 감소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사탕수수 생산량을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탕수수를 베어야 한다고 농부들에게 호소했다.

그것은 주 교역대상국을 바꾼 첫 해이니 만큼 수확량이 기대한 만큼은 충족되어야 한다는 바람이기도 했다. 결국 그 해에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량은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6백80만 톤에 이르렀다.

우방국의 교체는 더욱 공고해졌다. 1961년 12월 2일, 그란마 호의 상륙으로부터 5년이 지난 그 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의 성격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공식 규정했다.

그러나 소련 국내에서는 나름의 숨가뿐 정치적 변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포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한술 더 떠 흐루시초프는 처음으로 마오쩌둥을 대놓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대답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멕시코 대통령들을 통하여 백악관에까지 전달되었다. 쿠바는 이런 식으로 대륙과 연결된 닻줄을 자연스럽게 끊었다.

이어 모스크바와의 직통전화가 연결된다. 미주기구로부터의 쿠바 축출이라는 소식은 1962년 새해 벽두부터 충격을 몰고 왔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의 가브리엘 로뱅은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62년 1월,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미주기구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쿠바를 회원국에서 축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반구에서의 소련 블록'의 개입을 성토하는 성명을 체택하면서 모든 회원국들에게 이 전염병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나마 즉각적인 집단제재를 막았던 것은 멕시코와 브라질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2월 초순부터 미국 정부는 쿠바로부터 들어오는 일체의 상품을 압수한다고 공표했으며 한 달 반 뒤, 이 조치는 제3국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쿠바 물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조치는 점점 강화되어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동맹국들이 쿠바에 제재를 가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와 궤를 같이하여 아르헨티나에 이어 에콰도르도 아바나와의 관계를 끊었다.

3월 2일, 미국과 이 작은 섬나라의 냉전무드는 점점 심화되어 갔다. 여기에 쐐기를 박겠다는 듯 케네디는 쿠바로부터의 모든 수입을 금지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하였다. 이어 11일, 미국 정부는 이 오만불손한 이웃에게 농산물을 팔지 않겠노라고 발표했다.

의회로부터 한 번 혼쭐이 난 적이 있는 젊은 대통령은 자기도 힘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때였고 미국의 위신이 추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당시 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탕수수 농업의 기계화였다. 그는 1959년에 플로리다에서 찍어온 콘티누아라는 모델을 바탕으로 하여 쿠바에 맞는 기계들을 만들어낼 작정을 하였다.

이 사업은 만만한 사업이 아니었다. 쿠바인들은 10여 년 전부터 거의 폐품이 되다시피 한 낡은 톤턴(Thornton)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고 1962년 4월, 마침내 두 종류의 기계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체는 이 일을 기회로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이 작은 섬에서 제국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중대한 임무까지 부여받은 우리는 모든 아메리카 국가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가 우리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며 동시에 기술이라는 영역에서 발전을 이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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