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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진로] 1. 폐쇄적인 가족경영

중앙일보

입력

해방 이후 반세기 가량 지속돼온 재벌체제에 또 한번 대변화의 기회가 마련됐다. 한국 최대의 재벌인 현대그룹에 의해서다.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과 몽구(夢九).몽헌(夢憲) 두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대주주로서의 권리만 행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래 재벌이란 '대주주 가족이 경영을 지배하는' 가족 지배구조가 핵심적인 특징이다.

계열사들을 묶어 그룹으로 경영하는 그룹 경영체제는 부가적인 특징이다. 일본의 재벌 연구가인 시모타니(下谷政弘)교수(京都大)가 "재벌을 재벌답게 하는 유일한 특징은 가족의 폐쇄적인 소유경영 지배에 있다" 고 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가 가족의 경영지배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재벌체제의 종언(終焉)' 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 재벌 역사상 가족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사례는 현대 외에도 있었다. 가깝게는 두산그룹이나 대림그룹 오너들이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덩치 면에서는 현대그룹에 비교할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정주영 명예회장은 재벌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강원도 통천의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그야말로 맨손으로 한국 최대의 재벌을 일군 신화적 인물이었다.

그런 鄭명예회장이 물러나면서 자신뿐 아니라 후계자인 두 아들까지 동반 퇴진하는 것은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그만큼 다른 재벌그룹에 미치는 파장도 엄청날 것이다.

현대의 선언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그동안 정부는 느슨한 계열사간 제휴를 종착역으로 놓고 재벌체제를 바꾸려고 시도해왔다.

소액주주 및 이사회의 권한 강화를 양축으로 해 가족의 경영지배를 완화하려고 시도했다.

부채비율 2백% 제한과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부당 내부거래 규제 등 그동안의 재벌 행태를 고치려고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현대는 끄떡없었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왕(王)회장의 현대' 는 스스로 대변신을 선언했다.

정부가 백마디, 천마디 얘기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살기 위해 선택한 자생적 변화였다.

이제 삼성과 LG.SK 등 다른 재벌그룹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이들 재벌과 현대는 다소 달랐다.

현대가 좀 더 '왕조적 지배체제'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면 현대그룹은 여타 재벌들의 오너가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여타 재벌들은 현대가 앞으로 추진해야만 할 지배구조 개선의 내용을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사회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고, 사외이사를 포함해 사내이사의 추천과 선출권한이 각 계열사로 이관되고, 소액주주가 상징하는 주주총회의 권한이 막강해진다면, 무엇보다 경영지배권을 오너에게서 이관받은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의 권한이 막강해진다면 국민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가 가족의 경영지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계열사간 제휴까지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느슨한 그룹 체제는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스웨덴의 월렌버그(Wallenberg)그룹처럼 비록 오너가 소유는 하되 경영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을지라도 계열사간 제휴를 통해 그룹체제는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상은 물론 재무상의 시너지효과를 위해서라도 계열사간 제휴는 필요한 측면도 있다.

어쩌면 일본의 기업집단이나 계열처럼 가령 '사장회' 같은 비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제휴체제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에도 오너들은 경영일선에서 퇴진한 만큼 이런 모임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전 재벌처럼 지주회사 가능성도 있다.

오너 가족들은 지주회사의 지분을 가지면서 지주회사의 경영진을 선임하고 동시에 이들을 통해 자회사의 경영진 임면을 좌우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방송대 김기원 교수가 "이사회 조직 등 지배구조가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눈 가리고 아웅' 일 가능성이 크다" 고 말하는 것은 이런 가능성에서다.

2세들이 남북경협사업에만 주력하겠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무슨 자격으로 하려는지 모르겠다" 고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그렇더라도 金교수는 "한국 재벌 변화의 큰 획임은 분명하다" 고 '현대 선언' 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패러다임의 전환인 만큼 반전과 재반전 등 굴곡도 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변화의 물꼬는 터졌다. 그것도 크게 터졌다.

그냥 놔둬도 이렇게 재벌이 변한다는 것을 왕회장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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