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비행에 나서기 전날 밤의 설렘과 두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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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미소짓고, 한 번은 감동하고, 한 번은 순수에 젖는다. 생텍쥐페리의 '대지'에 들어서면 혼자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모조리 맛볼 수 있다. 〈인간의 대지〉라는 제목 때문에 까다로운 철학서쯤으로 생각한다면 〈어린 왕자〉의 지은이에 대한 모독(?)이다.

미소: 교육을 마치고 첫 비행에 나서기 전날 밤 설렘과 두려움에 젖은 생텍쥐페리는 동료이자 선배인 기요메에게 항로에 관한 지리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배운 지리는 참으로 괴상한 것이었다. 과디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과디스 근처 어느 밭둑에 있는 오렌지나무 세 그루에 대해서만 일러주는 것이다.

"그것들을 조심하게. 자네 지도에 그것들을 표시해두게." 그 뒤부터 생텍쥐페리의 지도에는 그 오렌지나무 세 그루가 '시에라네바다 산맥보다도 더 크게' 자리잡게 된다. 지리학자는 큰 도시들을 먹여 살리는 큰 강에나 흥미를 보일 뿐 서른 그루쯤 되는 꽃을 먹여 살리는 실개천에는 관심이 없다. 기요메는 생텍쥐페리에게 에스파냐의 지리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에스파냐를 친구로 만들어준다.

감동: 안데스를 우편비행기로 횡단하던 기요메가 실종된다. 그러나 이레째 되는 날 그는 기적처럼 살아와서 생텍쥐페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일은 맹세코 어떤 짐승도 한 적이 없었을 거야." 비행기가 '모자처럼' 안데스의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뒤 험한 눈보라 속에서 그는 이틀 동안 우편낭을 뒤집어쓰고 폭풍이 멎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걷기 시작한다.

굶주림과 추위보다도 무서운 것은 잠, 이틀을 걷자 지친 그에게 무시무시한 수마(睡魔)가 찾아온다. 초인적인 영웅처럼 잠을 이겨내고 계속 걸었다? 천만에. 그건 비현실적일뿐더러 재미도 없다. 처음에 그는 '터빈처럼' 제멋대로 돌아가는 자신의 두뇌에 생각거리를 불어넣어준다. 그동안 그가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가 모조리 잠을 쫓는 재료로 동원된다.

그 다음에는 아내를 생각한다. 프랑스 법에 따르면 실종이 사망으로 처리되기 위해서는 4년이 걸린다. 사망자가 되어야 그의 아내는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려면 그의 시신이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잠들어 죽으면 봄에 눈이 녹으면서 그의 시신은 안데스의 수많은 심연 중 하나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그의 눈에 50미터 위쪽의 바위가 들어온다. 거기에 몸을 걸쳐놓으면 이듬해 여름에 시신이 발견되겠지. 이렇게 해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 그는 이후 이틀 밤과 사흘 낮을 걸었고, 마침내 생텍쥐페리를 다시 만났다.

순수: 아르헨티나에 불시착한 생텍쥐페리는 아무도 겪지 못한 동화를 체험한다. 매력있게 퇴락한 어느 시골 농가에 초대된 그는 후덕하고 여유 만만한 주인과 '순수의 허영'에 사로잡힌 두 예민한 처녀를 만난다.

식탁 아래에서 뭔가가 그의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무사예요." 두 처녀는 이렇게 말해놓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낯선 손님의 눈치를 살핀다. 그는 '다행하게도' 싱긋 웃었고, 두 처녀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언젠가 그 처녀들이 '세속의 허영'에 눈뜰 것을 걱정한다. 그들은 시를 읊는 못난이를 시인으로 착각하고 덜컥 '열아홉 점'을 줄지도 모른다(프랑스어에서는 일종의 '20진법'을 쓴다. 이를테면 80이라는 숫자는 quatre-vinhts, 즉 4×20으로 표기한다. 그러니까 처녀들이 매기는 점수에서는 20점이 만점이다). "그럼 그 바보 사나이는 공주를 종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어린 왕자〉도 그렇듯이 생텍쥐페리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간결한 문체 속에 수많은 상황과 감정을 집약하는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문단 구분도 없이 몇 쪽에 걸쳐 이어지는 길다란 심리 묘사로 감동을 쥐어짜낸다면 생텍쥐페리는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같은 효과를 빚어낼 줄 아는 작가다.

그럼에도 그가 도스토예프스키만한 대문호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가 직업 비행사로서 '작품 외적 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비행 도중 마흔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히 늙지 않는 왕자'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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