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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탄의 사수’가 포문을 열자 보헤미아 삼림의 초목 향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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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호 05면

이런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던 베를린 필에서, 아벤트로트가 지휘하던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에서, 혹은 카일베르트가 지휘하던 밤베르크 심포니에서는.
6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선 마렉 야노프스키와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는 수많은 청중을 독일의 오케스트라 전국시대로 안내했다. 더 이상 포착할 수 없지만, 소리만으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개성을 탑재했던 오케스트라들과 거장 지휘자들의 시대로.

6일 세종문화회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내한 공연

일부러 부풀리지 않은 관과 현의 텍스처는 촘촘했다. 총주에서 부딪치는 타격음은 정확히 한 줄로 잡힌 바지 주름 같았다. 지휘자 야노프스키의 존재는 더없이 빛났다.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단원들이 그의 날카롭고 역동적인 지휘봉에 따라 민첩하게,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큰 톱니와 작은 톱니들이 무수히 연결된 커다란 시계였다. 그럼에도 각각의 톱니들은 기계적이지 않고 유기적이었다. 그런 연주 모습은 지휘자를 마음 깊이 존경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과 2009년에 이어 세 번째 내한 무대. 야노프스키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은 베버 ‘마탄의 사수’ 서곡으로 포문을 열었다. 보헤미아 삼림의 초목 냄새가 묻어나는 푸근한 호른 연주에 이어 숙명적인 어둠을 드리운 채 크레센도와 데크레센도의 산맥이 굽이굽이 지나갔다. 2003년 처음 봤을 때 인상적이었던 분투하는 현악군의 모습이 재현됐다. 이들의 일사불란한 보잉에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나는 1층 뒤쪽에서 들었는데, 소리가 멀리 퍼지지 못하고 음의 캔버스가 생각보다 작았던 점은 아쉬웠다. 좀 더 작고 울림이 풍성한 홀이었다면 어땠을까. 2003년의 예술의전당과 2009년의 아람누리, 그리고 올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들었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사운드는, 비슷한 풍경을 크기가 다른 모니터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이어진 협연무대는 재작년 하마마쓰 콩쿠르 우승과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에 빛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함께한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였다. 2003년 첫 내한 때 김대진이 협연했던 곡과 동일했다. 김대진의 ‘황제’가 섬세하고 서정적이었던 데 비해 조성진의 해석은 1악장에서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승차감 좋은 서포트를 받으며 야성적이고 남성적인 측면을 모색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3악장에 와서는 야노프스키의 카리스마에 위축된 느낌이었다. 2009년 공연 때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 온 김선욱이 야노프스키의 카리스마에 쩔쩔매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조성진에게 도발적인 반골기질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치고 나가야 할 부분에서 망설이면 오케스트라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 협주곡이다. 언젠가 번스타인은 굴드와 협연하며 “협주곡에서 지휘자와 협연자, 누가 보스인가?”를 청중에게 물었다. 굴드의 미소는 그 답을 말해주었지만,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스는 확실히 지휘자 야노프스키였다.

조성진은 앙코르로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연주했다. 자발성이 배가된 연주였다. 곡이 전개되면서 조성진 본인이 협주곡에서 답답해했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이날의 협연은 앞으로 조성진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다.

인터미션 후 연주된 브람스 교향곡 3번은 이날의 백미였다. 브람스가 남긴 네 곡의 교향곡 중 요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곡이 바로 3번이다. 낭만성을 부풀리려 하면 뼈대가 없이 곡상이 희석되게 마련이고, 구조를 드러내다 보면 앙상하고 무미건조해지곤 하기 때문이다. 야노프스키는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자로 불린 브람스의 고전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그의 브람스 교향곡 해석에는 질풍노도의 사조가 휩쓸던 18세기 고전주의 시대 교향곡의 이디엄이 녹아 있었다. 곡의 겉껍질은 낭만적으로 유지하되, 그 안에서 움직이는 단원들의 연주는 엄격한 형식미를 지향했다. 야노프스키는 두텁고 불투명한 해석으로 귀에 안 들어오던 부분들을 명료하게 정리하면서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일관된 호흡으로 해석했다. 밝게 부풀어 오르는 1악장, 고요하다 불현듯 가슴 뭉클한 순간을 맞이하는 2악장,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테마로 유명한 3악장을 지나 모호해지기 쉬운 4악장을 명쾌하게 처리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해가 떨어지듯 사라지는 맨 마지막 부분이 약간 어색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

이들은 앙코르로 베토벤 교향곡 8번 중 2악장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를 들려주었다. ‘우아한 고전 양식의 백화점’이라 할 수 있는 이 곡을 능란하게 처리하는 야노프스키의 손끝을 보며, 몇 달 전 들었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사이클 첫날 연주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교향악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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