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윌리암스 〈욤욤공주와 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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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가 외눈박이 괴물에게 점령당했지만 오직 한 나라만은 점령당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황금왕국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3개의 황금 공이 그 나라를 지켜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라가 위험에 처 했을 때 간단한 수수께끼를 푸는 한 사나이가 나라를 구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국 애니메이션 〈욤욤공주와 도둑〉(원제: The Thief and the Cobbler)은 94년에 국내 극장 개봉되었던 작품이다. 극장 개봉되고 비디오로 출시(스타맥스)된 사실조차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애니메이션은 바로 리차드 윌리암스 감독의 열정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리차드 윌리암스는 이름보다는 작품이 더 유명하다. 1988년의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Who Framed the Roger Rabbit?)와 1974년의 〈핑크 팬더의 귀환〉(The Return of the Pink Panther)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그다.

비운의 감독 리차드 윌리암스

〈욤욤공주와 도둑〉의 애니메이션 구상은 1964년 리차드 윌리암스가 이슬람 설화작가 Idries Shah의 이야기를 읽고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1968년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되었고 1994년 완성되었다. 거의 30년이 걸린 셈인데 오랜 기간만큼 이 작품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리차드 윌리암스는 250회라는 놀라운 수상 경력이 있다 (오스카상을 3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애정을 갖고 시작한 〈욤욤공주와 도둑〉에서는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고 흥행에도 실패하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열정을 담고 시작한 작품을 의도대로 만들지도 못했고 마무리 작업을 남에게 빼앗기면서 작품이 훼손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당해야만 했다.

〈욤욤공주와 도둑〉에 대한 감독의 열정은 대단했다. 다른 작품들로 번 돈을 거의 여기 쏟아 부었는데, 〈로저 레빗〉이 아카데미 상을 받으면서 받은 상금은 이 작품제작의 좋은 밑천이 되었다.

작품 내용을 뛰어넘는 영상미

이 작품은 나(구두수선공 압정)의 나래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두 수선공이 황금왕국에 쳐들어 온 외눈박이 괴물과 그와 결탁해 공주와 결혼하려한 나쁜 신하 지그작을 물리치고 황금왕국의 평화를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언뜻 보면 〈알라딘〉을 보는 듯도 하다. 평범하고 가난한 구두수선공(압정(Tack))과 황금왕국의 왕(노드왕)과 공주(욤욤공주). 공주와 결혼하려는 나쁜 신하(지그작) 그리고 줄거리에 관계없이 감초역할을 하는 지니 같은 존재 도둑이 그것이다.

여기서 도둑은 지니처럼 수다스럽지 않다. 아니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머리 위에 쉴새없이 파리가 날아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도둑은 스토리와 상관없이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흐름에는 모두 그가 등장한다. (황금 공을 훔쳐내 황금왕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스토리상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원제가 〈The Thief and the Cobbler(도둑과 구두수선공)〉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눈 여겨 볼 것은 스토리뿐만이 아니다. 그 이상이 기다리고 있다.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기가 막힌 2차원적 배경

〈욤욤공주와 도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배경이다. 이 배경은 놀랍게도 직선으로 이루어진 세모와 네모로 이루어져 있다. 이 평면적인 무늬에 등장인물들(주로 구두수선공과 도둑)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움직이는 캐릭터로 인해 평면이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특히 공주의 신발을 훔쳐가는 도둑을 잡기위해 구두수선공이 궁전을 뛰어다니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입이 딱벌어진다. 평면인 듯 싶더니 그 곳에 공간이 펼처진다. 그리고 평면적인 도형이 흑백에서 칼라로 전환되면서 입체적인 느낌이 살아나는 장면은 너무나도 멋지다.

뒤늦게 삽입된 어울리지 않는 노래와 대사

이 작품은 리차드 윌리암스의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투자자가 Warner Bros.를 거쳐 CBC로 바뀌면서 리차드 윌리암스와 그의 스튜디오는 쫓겨나게 되고 그 대신 프레드 칼버트가 위임받아 작업을 끝냈다.

이 과정에서 상업성을 위해 많은 노래가 삽입되면서 윌리암스가 만든 장면이 많이 잘려나갔으며 동화작업은 우리나라에서 맡아서 하게 된다.(장면들을 유심히 보면 너무 평범한 배경과 색감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일단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1994년 호주와 남아프리카에서 〈The Princess and the Cobber〉라는 다른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작품을 수정해 〈Arabian Night〉(아리비안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Miramax에 의해 미국에서 개봉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전 작품보다 더 엉망이었다.

〈욤욤공주와 도둑〉은 작업 초기때부터 스토리보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만큼 애초부터 대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개봉작은 작품의 상업성을 위해 대사가 거의 없는 캐릭터에 끊임없는 나래이션과 대사를 집어넣었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별로 움직이지 않는 입에서 많은 대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상처투성이 걸작은 1996년 디즈니에 의해 비디오로 출시되는데 그때는 원래의 제목 〈The Thief and the Cobber〉로 출시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이 작품은 훌륭하다. 도형들로 이루어진 배경 뿐만 아니라 개성이 잔뜩 묻어있는 캐릭터를 보는 재미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 정도의 작품을 '감독의 원래 의도를 저버려 망쳐진'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니 감독 원래의 작품(디렉터판 필름)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았으니 언제 볼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밀수품으로는 구할 수 있다는 후문만이 나돈다).
리차드 윌리암스 감독의 감각과 표현기법이 듬뿍 담겨있는 오리지널 필름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보며 아쉽지만 이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 리차드 윌리암스 작품

〈The Thief and the Cobbler〉(1994)
〈Who Framed Roger Rabbit〉(1988)
〈Ziggy's Gift〉(1982)
〈Raggedy Ann and Andy〉(1977)
〈The Return og the Pink Panther〉(1974)
〈Slaughter's Big Rip-Off〉(1973)
〈Chrismas Carol〉(1972)
〈Heart of a Child〉(1958)
〈The Little Island〉(1958)
〈Love me, Love me, Love me〉(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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