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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정부·재계, 한국경제의 쌍두마차 될까

중앙일보

입력

한나라당의 정책브레인인 A씨는 “한나라당이 재벌을 비호한다”고 하는 일각의 여론을 몹시 부담스러워한다. “이회창 총재에게 우리가 여당보다 더 강력하게 재벌을 비판하자고 건의할 참”이라는 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요즘 일고 있는 정부와 재계간의 화해(?)
무드는 어느새 날아갈는지도 모른다.

사실 4월20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단들의 골프 모임에서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재벌 구조조정본부의 필요성과 30대 기업집단 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면서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 국세청의 3대 그룹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 계획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서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이러다간 나라 경제가 거덜나지 않을까”라는 위기감도 높아졌다.

재계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 “손부회장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게 없고 다 옳은 얘기지만 시점이 문제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총선에서 여당의 ‘사실상 패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왜 전경련은 4대 재벌만 변호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구조조정본부 해체에 민감한 곳은 4대 재벌이라는 의미다. 이런 긴장관계가 4월28일 이헌재 재경부 장관과 김각중 전경련 회장 등 4대 경제단체장들이 만나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서서히 풀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오해와 대립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대화 채널을 만들기로 했다”는 재경부의 회의 결과 설명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정·관계와 재계는 화해(?)
무드로 돌아갈까? 그래서 재벌개혁은 없던 일로 될까? 만약 한나라당이 강력하게 재벌을 비판하고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앞의 Y씨의 설명을 좀더 들어보자.

“어차피 정치는 국민의 표 싸움이다. 표를 더 모으는 게 정당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표를 모으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국민의 반(反)
재벌 정서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당보다 더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반재벌’입법화가 쉬워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5월 중순 법무부의 ‘기업지배구조개혁 보고서 및 권고안’이 나온다. 지난 연말에 나온 초안의 내용과 달라진 게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본지 531호 참조)
.

송병락 서울대 부총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선물한 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만평.
그렇다면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당장 대규모 내부거래는 사외이사와 주주들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주주도 이사를 추천할 수 있으며 사외이사들이 절반이 넘는 이사후보 추천위원회도 둬야 한다.

단 한 주라도 6개월 이상 보유하면 회사를 대신해 이사에게 피해 소송(대표 소송)
을 제기할 수 있고 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도 할 수 있다.

오너가 마음에 안 드는 이사를 해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른 모든 이사들도 같이 해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오너가 가져야 하는 대표이사 선임권이 완전히 무력화 된다는 얘기다. 재벌 오너의 권한과 기능은 크게 약화되고 ‘그룹형 경영’이라는 기업 결합 구조의 골격도 대폭 흔들릴 것이다. 구조조정본부 해체는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구조조정본부 해체는 이미 재벌들도 각오하던 바였다. 지난 연말부터 ‘대체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주력 계열사의 회장실이나 기획실도 기능과 권한을 넘기는 것을 ‘도상(圖上)
’연습했었다. 중장기적으로는 지주회사 설립 요건이 완화되면 지주회사를 통해, 이도저도 아니면 모든 계열사를 하나로 뭉쳐 단일 회사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했었다.

정부 역시 근본적인 재벌 개혁은 하지 않을 것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재벌은 두 가지의 구조가 결합된 것이다. 소유자가 경영하는 소유경영자 구조와 많은 업종의 다수 계열사가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움직이는 선단식 경영 구조가 그것이다.

두 가지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소유경영자 구조다. 구조조정본부는 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구조를 없애려면 소유자에게서 주식을 빼앗든지, 특정 계열사만 소유하게 하고 나머지 계열사는 지분을 맞바꿔 공기업 내지는 전문경영인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현행 법과 제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돼 있다. 대신 정부는 오너에게 책임을 지웠다. 오너가 경영할 경우 특정 기업의 이사로서 하라는 얘기였다. 더불어 경영이 유리알처럼 보여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경영투명성을 위한 장치를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기본적으로는 오히려 선단식 경영구조의 해체에 더 역점을 뒀다. 역시 두가지 각도에서 진행했다. 구조조정본부 해체는 ‘사령탑’의 무력화다. 또하나는 그룹형 경영의 약화다. 소수주주와 사외이사, 이사회, 감사들 권한을 강화시키는 지배구조의 개선은 이 목적이 거의 다다.

재벌개혁 5원칙이나 ‘플러스 3’원칙은 대부분 이를 겨냥한 것들이다. 물론 이것들도 하나같이 재벌들에게는 매우 아픈 것들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재벌의 해체에 기여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계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도 어느 정도 보폭조정에 고심한 흔적이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되 기업 정관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소수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율도 대폭 낮췄을 것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실시 시기를 내년에서 금년으로 앞당겼을 것이다.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정부와 재계의 갈등은 상한선을 그어놓은 갈등”. 요즘 양측 관계를 이렇게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결국 재벌의 구조조정본부는 정부와 재계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기 때문에 조만간 해체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상한선은 오히려 ‘침범’을 유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코노미스트=김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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