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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정전대란, 이래서 터졌다 ① 이상기후 잦은데 정책은 정책은 ‘정상’ 기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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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전국적인 전력 대란은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했듯 ‘후진국형 사고’였다. 전력을 책임지고 있는 지식경제부와 전력거래소·한전 등이 제 역할을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단순히 누군가의 순간적 실수나 판단 착오로만 몰아가는 건 문제가 있다. 15일의 정전 사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유사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계속 커져 왔기 때문이다. 이상기후로 인한 농작물 파동과 지난여름의 ‘물폭탄’을 거치면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은 서툴기만 했다. 전기요금이 싸다 보니 전력소비량 자체도 많았다. 그래서 “터질 게 터졌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온다.

“전력 수요가 많을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그 정도까지 갈 줄은 미처 몰랐다.”

 15일 초유의 ‘정전대란’ 이후 정부와 전력거래소 등의 관계자들이 공통으로 하소연하는 말이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설령 ‘감’을 잡았더라도 제대로 대처가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정전사태 이후 비상이 걸린 16일 전력 당국은 가능한 모든 대책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에도 예비 전력은 한때 적정 유지선인 400만㎾ 아래로 떨어졌다. 기본적으로 발전용량 자체가 ‘정상 기후’를 전제로 빠듯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수급 예측, 발전소 정비, 비상 수급대책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돌발상황이 터지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알고도 당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발전소 정비의 경우 시스템상 봄·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전력소비가 몰리는 여름·겨울엔 거의 ‘풀 가동’ 돼야 하기 때문이다. 전력량의 11%(893만㎾)를 차지하는 23개 발전소가 15일 정비 중이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기온이 정상적이라면 그런대로 굴러가고, 지금까지 그렇게 버텨 왔다. 하지만 늦더위란 ‘검은 백조’가 출현하자 ‘전력대란’이 빚어진 것이다.

 정부 정책 역시 정상 기후를 전제로 삼는다. 이달 중순까지 이어진 늦더위에도 불구하고 이상 기후에 대한 지식경제부의 대처는 비상수급 대책기간을 예년보다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전소가 무더기로 정비에 들어가는 상황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정태근(한나라당) 의원은 18일 낸 자료에서 “전력거래소 측은 늦더위를 고려해 발전소 비상가동 시기를 일주일 늦췄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이 아닌 거짓”이라며 “1~2일 발전소 정비를 늦춘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예정대로 정비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전력거래소의 수요예측 프로그램은 2000년대 초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기후 변화가 본격화되고 전기수요도 예상보다 급증한 상황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종택 전력거래소 중앙급전소장은 “현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중”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가 본격화하면서 더 이상 ‘이상(異常)기후’란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날씨가 이젠 정상이 됐다. 기후의 ‘뉴 노멀(new normal)’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지체 현상이 이번 정전대란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창섭 경원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기후변화를 예측하지 못한 게 발전 용량 부족과 정전사태를 초래한 핵심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겨울이 추워지면서 여름과 겨울에 전력 피크가 동시에 오는 상황이 최근 2~3년에 새로 생겼다”며 “이런 경우 수요의 변동폭을 더 넓게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짓기 시작하면 8년씩 걸리는 발전소 건설 속도가 기후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전기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상기후는 지난해 말 이후 물가 당국을 괴롭히고 있는 고물가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올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5.3%까지 끌어올린 주범은 전국을 강타한 ‘물폭탄’과 농산물 값 급등이었다. 올 들어 8월 말까지 시간당 30㎜ 이상 폭우가 내린 경우가 128차례에 달했다. 1980년대에는 연평균 44차례에 불과했다.

 이런 공급 측면의 물가상승은 지난해 이후 정책 당국엔 심각한 딜레마다. 돈이 풀려 생기는 인플레는 금리를 올려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공급발 물가불안에 금리로 대응할 경우 물가도 못 잡고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경기만 꺾어 놓을 수 있다. 한마디로 대응이 쉽지 않다. 고물가에 대한 원성이 커지는 속에서도 당국이 소소한 ‘미시대책’에만 발이 묶여 있었던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이었다.

 기후변화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대응이 늦어지면서 생기는 경제적 피해는 상상을 넘어선다. 최근 서울대 권오상 교수는 지난해 이상기후로 발생한 사회경제적 손실액이 25개 산업에서 3조원을 넘어섰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쌀(6504억원), 채소·과실(8230억원) 등 농업부문의 생산 손실은 물론 금융·여가 서비스(2162억원)의 피해도 막대한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도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말 “이번 정부 들어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등 기상이변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적인 법적·정책적 인프라를 갖췄지만 ‘손에 잡히는 대응체계’를 구축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밝혔다.

조민근·임미진·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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