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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이회창, 그리고 안철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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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02면

세상이 온통 안철수 얘기다. 한국인의 다혈질성,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성을 감안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사례는 또 없을 것 같다. 한데 왠지 마음이 흔쾌하지가 않다. 개인적으론 나도 안 교수를 좋아한다. 얼마 전 숨진 이태석 신부나 안 교수가 살아온 헌신적 삶을 생각하면 같은 또래 된 입장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죽으면 그저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안 교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담담한 대답 속에 오히려 삶에 대한 진지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숙연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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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상 그 어떤 정치적 천재나 위인도 안 교수처럼 단 며칠 사이에, 출마의사도 안 밝혔는데 현실 정치판에서 이런 꿈같은 지지도를 얻어낸 적은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안철수 신드롬’이 불안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너무 환상적이다. 그의 높은 지지도에 이의를 달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게 안철수가 잘나서만이 아니라 병든 대한민국 정치에 대해 국민들이 홧김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안 교수 본인에게도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독을 품은 복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턱대고 먹다간 끔찍한 참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안 교수가 권력의 본질에 내포돼 있는 이런 독성적 요소를 얼마나 잘 판별해 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안 교수의 성공이 너무나 화려한 데 비해 복어의 독을 발라내는 ‘정치적 요리수업’은 너무 부족한 것만 같아서다.

안철수 열풍에 가장 황당한 사람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일 것이다. 얼마나 은인자중하며 준비해 왔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있다. 9년 전인 2002년 대선 때도 그랬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창(昌) 대세론’은 막강했다. 그는 김대중(DJ) 정부 5년 내내 여소야대 정국을 장악한 야당 총재로서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즐겼다. 하지만 느닷없는 노무현 바람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두 분 다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박 전 대표와 이 전 총재는 닮은 구석이 적지 않다. 우선 범상치 않은 집안 배경이 그렇다. 이 총재의 경우 본인은 물론 부친과 처가 쪽을 합쳐 법조계의 대표적 ‘명문가’였다. 박 전 대표는 거기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암살 등 비극적 가족사가 주는 비장함까지 더해져 있다. 또 이 총재는 ‘대쪽’으로, 박 전 대표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면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좀 부정적인 것이다. 우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 어렵고 무서워한다. 그것은 범접하기 어려운 엄숙함에다, 한 번 잘못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합쳐진 것이다. 두 분의 인간성이 나쁘다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외부에 비쳐지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시간이 갈수록 측근들의 힘이 강해지고, 밖에서 접근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정치부 후배 기자들이 “박 캠프가 갈수록 창 캠프와 비슷해진다”고 종종 불평하는 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역사는 같은 식으론 반복하지 않는다. 안철수는 노무현이 아니다. 그러니 박근혜가 이회창일 리도 없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배우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박 전 대표는 이회창 총재의 실패로부터 반면교사(反面敎師)할 점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좀 덜 신비하고, 좀 더 친근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 당이 공식적으로 임명하지도 않은 캠프 대변인을 통해 자기 의사를 밝힐 수는 없다. 직접 기자들과, 국민들과 맞부닥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병 걸리셨어요?” 같은 말실수가 되풀이될 수 있다. 이회창 총재도 기자들에게 “창자를…”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증류수는 잉크 한 방울만 떨어져도 오염된 것처럼 보인다. 이 총재의 아들 병역의혹이 그랬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박근혜도, 안철수도 그 누구도 증류수일 순 없다. 그렇다고 주장하면 위선자다. 박 전 대표든, 안 교수든 대중이 열광하는 신비주의에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좀 덜 깨끗해 보여도, 그게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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