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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산에서 만난 사람 - 산악인 오은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등정한 오은선 대장이 날렵한 자세로 불암산을 오르고 있다.

월간중앙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한 여성 산악인. 지난해 이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도 ‘칸첸중가’ 등정의 진위설에 휘말려 그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의 나락을 치러야 했다. 그가 신발끈을 고쳐 매고 다시 산을 찾는다. 불암산을 오르는 내내 그가 이 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전 8시 5분 전 태릉입구역 개찰구를 통과했다. 오늘은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모두 정복한 오은선(한국여성산악회장) 대장과 함께 불암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동안 여러 사람과 산을 탔지만, 오늘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어젯밤 잠도 설친 터다. 함께 동행하기로 한 KBS 임병걸 부장은 이미 도착해 있다.

약속한 8시가 되자 오 대장이 전철역 개찰구를 나선다. 반갑게 악수했다. 그런데 내 손에 들어온 오 대장의 손이 여느 여인처럼 부드러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선입견 때문에 그의 손이 억세고 거칠 거라 생각했는데….

키 155cm의 아담한 여인, 이처럼 부드러운 손을 가진 여성이 히말라야의 그 거봉 14개를 모조리 정복했다고? 그것도 세계 최초로 말이다. 택시에 올라 산행 출발지인 불암사로 가면서도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내 어수선한 머릿속만큼이나 오늘 날씨도 오락가락이다. 장마전선이 아직도 중부지방에 머문다고 하니 계속 비를 뿌릴 기세다. 도대체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언제였더라?

배낭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불암산 품으로 들어선다. 오 대장은 1997년 7월 17일 가셔브롬II봉(8035m)을 등정한 이후 에베레스트(8848m, 2004.5.20), 시샤팡마(8027m, 2006.10.13), 초오유(8201m, 2007.5.8), K2(8611m, 2007.7.20), 마칼루(8463m, 2008.5.13), 로체(8516m, 2008.5.26), 브로드피크(8047m, 2008.7.31), 마나슬루(8163m, 2008.10.12), 칸첸중가(8586m, 2009.5.6), 다울라기리(8167m, 2009.5.21), 낭가파르밧(8126m, 2009.7.10), 가셔브롬I(8068m, 2009.8.3)을 차례로 정복한 뒤 지난해 4월 27일 마지막으로 안나푸르나(8091m)에 올랐다.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정복한 것이다. 그것도 12년 9개월여 만에 이뤄낸 쾌거다.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모조리 정복했는데, 도대체 처음 산에 오른 때가 언제쯤인가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랑 도봉산으로 소풍 가다 차 안에서 인수봉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인수봉이 제 눈에 쏙 들어오는 거예요. 산에 대한 꿈을 키웠다면 아마 그때부터일 겁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산에 오른 것은 수원대(전산과)에 입학한 뒤 산악반에 들어가서죠. 등반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히말라야에 처음 간 것은 1993년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한 한국여성에베레스트원정대에 참여할 때였어요.”

필자와 오은선 대장. 그리고 산행을 함께한 KBS의 임병걸(가운데) 부장이 산행 중 잠시 한숨을 고르고 있다.

해외 산행은 히말라야가 처음이었나요?
“맞아요. 1989년 대학 졸업 후 서울과학교육원에 입사해 전산직 공무원으로 일했죠. 1991년에 겨울 에베레스트원정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는데 여성 원정대원 14명 중 한 명으로 뽑혔어요. 1993년에도 히말라야 원정을 계획했을 때는, 회사에서 장기 휴가를 줄 수 없다고 해서 고민 끝에 사표를 내고 말았죠. 그때는 식량담당을 맡았는데 7300m 캠프3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왔어요. 이때부터 히말라야 14좌가 제 가슴속에서 타올랐어요. 그러다 1997년 대학산악연맹에서 가셔브롬I, II원정대 일원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정상에 처음 올랐죠.”

등산로의 시작점에 불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세조가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원찰(願刹)을 지을 때 동불암(東佛岩), 서진관(西津寬), 북승가(北僧伽), 남삼막(南三幕)을 조성했는데 그중 첫째로 삼았다는 절이다. 불암사를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조용히 공부할 곳을 찾다가 친구와 함께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주지스님은 “모든 것이 네 마음에 달렸다”면서 “공부를 위해 꼭 예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 잔잔하게 말씀하셨다. 그 주지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살아 계시기는 할까? 불암사를 옆으로 하고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들고, 우리의 이야기도 히말라야 14좌 속으로 들어간다.

14좌 대부분 무산소 등정
“1999년 선배 산악인인 박영석 씨가 브로드피크 원정을 같이하자고 하더군요. 그때 학습지 교사로 일했는데, 역시 회사가 허락해주지 않아 또다시 사직서를 내고 참가했죠. 그러나 그때 연세대팀 대원 한 명이 실종돼 눈앞에서 등정 시도를 접어야 했어요. 그해 가을에는 박영석 선배가 마칼루에 갈 때도 따라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세르파의 죽음과 눈사태를 만나 장비를 모두 잃어버리고 철수했어요.”

번번이 실패해서 아쉬움이 컸겠네요?
“그랬지요. 그래서 귀국한 후 돈을 많이 벌어서 산에 가자고 결심한 뒤 카페식 스파게티 집을 차렸는데 마음먹은 대로 안 됐어요. 힘들어하던 차에 2001년 박영석 선배가 자신의 14좌 등정을 마무리 짓는 K2에 같이 가자는 말에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어요. 결국 그때 가게를 정리하고 따라갔어요. 그런데 박영석 선배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할 때 박영도 대원이 추락사하는 바람에 2차 공격조였던 저는 정상 공격을 포기하고 박 대원 수색에 나섰어요. 그러나 곧 날이 어두워진 데다 강풍까지 몰아쳐 우리마저 위험에 처할 지경이어서 급히 내려왔어요. 그때 저도 50m나 추락했는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죠.”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군요.
“그때 저는 히말라야와 인연이 없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7대륙 최고봉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다행히 같은 해 12월 등산용품 전문업체인 영원무역 소속이 돼 이듬해 8월 여성 산악인만으로 유럽 최고봉인 엘브르즈(5642m)에 올랐고, 2003년 5월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매킨리(6194m)봉에 단독으로 올랐어요.”

2004년에는 드디어 대기록을 세우게 됐지요?
“2004년 1월 남미대륙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6959m)에 올랐고, 5월에는 혼자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8월엔 킬리만자로(5895m), 10월에는 호주 코지어스코(2230m), 12월에는 남극 빈슨매시프(4897m)를 연달아 올랐습니다. 그해에 한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지요. 그런데 잠시 쉬어 가라는 뜻이었는지 2005년 초 스키를 타다 오른쪽 다리에 복합골절상을 입어 1년 8개월 동안 산에 오르지 못했어요.”

1년 8개월씩이나요? 얼마나 몸이 근질거리셨어요?
“정말 좀이 쑤셨죠. 그래서 다리가 낫자마자 곧바로 히말라야로 달려갔어요. 2006년 10월 13일 시샤팡마 등정을 시작으로 14좌 등정을 계속해 지난해 4월 27일 마지막으로 안나푸르나를 올랐습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등정에 몇 번 실패하기도 해 재도전을 계속해 얻은 결과입니다.”

오 대장님의 히말라야 14좌 등정은 세계 여성 최초라는 점 말고도 남다른 기록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히말라야 14좌를 오르는 동안 모든 것을 최소화해 가장 적은 물량으로 가장 경제적으로 가장 빠르게 산소 없이 오르는 것을 추구했어요. 물론 마지막 안나푸르나는 세계 여성 최초의 14좌 등정이라는 각별한 의미가 있어서 생방송을 하느라 예외였지만 말입니다. 그 외에 에베레스트·초오유·브로드피크·로체는 셰르파 없이 단독으로 올랐습니다. 칸첸중가 등정 후에는 1주일 정도 휴식을 취하고 곧장 다울라기리로 이동해 2박 3일 만에 정상에 오르는 등 2008년에 4개봉, 2009년에 4개봉을 잇달아 올랐어요. 사실 안나푸르나도 2009년에 처음 시도했는데 정상을 한 시간쯤 남겨두고 악천후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결국 1년 뒤 재도전해서 성공했습니다. 또 에베레스트와 K2를 제외하곤 모두 무산소로 등정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히말라야 등정은 대규모 인원과 장비를 동원해 캠프를 착실히 쌓아 올리면서 정상에 접근하고, 등정 후에는 최소한 몇 달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오 대장은 2008년 이후 오른 열 개의 봉우리를 모두 무산소로 등정했다. 오 대장의 폐활량이 마라토너 황영조보다 오히려 낫다는 말을 듣는다지만 과연 철의 여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4000m를 넘어서면서부터 산소가 부족해 조금만 올라도 헉헉거렸다. 그런데 그보다 두 배 높이인 8000m 이상에서는 더 산소가 희박할 테고, 이 적은 양의 산소조차 기압이 낮아 제대로 들이마실 수 없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뇌나 폐에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 뇌수종·폐수종에 걸릴 위험도 높다. 그런 죽음의 지대를 쉬지도 않고 연속해서 오르다니!

불암산을 오르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했다. 빗발이 굵어진다 싶다가도 어느새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덕분에 평소 사람으로 붐비던 불암산이 한가롭게 느껴질 정도다. 빗방울이 굵어질 때는 숲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세지지만, 이상하게도 그 빗소리 속에서도 뭔지 모를 고요함이 느껴졌다.

불암산 정상의 턱밑에 있는 석천암(石泉庵)에 이르렀다. 암자 이름이 석천암이라니 분명 어딘가에 바위샘이 있을 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정상으로 뻗어 오르는 큰 바위에 미륵불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그 미륵불 발밑으로 샘이 있었다. 지금의 암자의 이름을 있게 한 샘이다. 석천암에서는 샘에 지붕을 덮고 벽을 둘러 문을 달아주었다. 석천암을 만든 샘의 물맛을 보고 싶어 문을 열고 국자를 들이댔지만 바위 면을 타고 흐른 빗물이 섞여 석천 고유의 맛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석천암은 여기저기 건설자재를 쌓아두어 어수선했다. 지난 1월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대웅전을 포함한 네 개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석천암을 돌아 나오는 길에 ‘불암산호랑이 은거 제1동굴’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불암산에 호랑이 동굴이 있었다고? 물론 진짜 호랑이가 아니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유격활동을 펼쳤던 육사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과 장병 7명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국군이 서울을 빠져나갈 때도 후퇴하지 않고 불암사 윤용문 주지스님과 석천암 김한구 주지스님의 도움을 받아 불암산 일대의 세 동굴을 은거지로 삼아 1950년 6월 29일부터 서울 수복 1주일 전인 그해 9월 21일까지 유격활동을 했다고 한다.

네 차례의 전투에서 적의 보급소와 수송부대를 습격하고, 납북되던 주민 100여 명을 구출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이들은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강원기 생도를 제외한 전원이 계급도 군번도 없이 장렬하게 산화했다. 강원기 생도 역시 상처가 악화해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들의 영웅적 활약에 마음이 뜨거워져 안내판 뒤로 가보니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 입구에는 알루미늄 문짝이 어색한 모습으로 달려 있다. 옆에 있는 임 부장이 “석천암에서 달아놓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문 옆 바위에 능도암(能道庵), 송월암(宋月庵) 등의 글자를 새겨놓은 걸 보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뜻깊은 일화를 담고 있는 동굴이라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발걸음을 재촉해 석천암 머리 위의 불암산 정상으로 향한다. 조금 더 올라 뒤를 돌아보니 눈앞을 가리던 나무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발아래로 갑자기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불암산 아래로 벌판 여기저기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물안개가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머리를 돌리니 마치 대전차군단이 어느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과도 같다.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임 부장에게 시인은 이런 풍경을 보면 어떤 시어(詩語)가 떠오르는지 여쭈려 했더니, 그의 눈은 벌써 운무의 춤사위에 흠뻑 빠진 듯하다.

불암산 정상으로 향하는 나무계단까지 바위의 표면은 비에 젖어 발을 딛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조심조심 오 대장의 뒤를 따라간다. 험한 히말라야의 설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더한 어려움과 맞섰던 그이기에 그를 따른다면 별문제가 없을 듯하다.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생사를 오갔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시죠?
“저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에 8300m 지점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몸이 탈진해 눈 위에 누웠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게 얼어 죽는다는 신호였겠죠. 그렇게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데, 어느 순간 번쩍하는 빛이 느껴져 벌떡 일어나 앉았어요. 제 랜턴 불빛을 보고 다른 팀의 셰르파가 저한테 다가온 거예요. 그 덕분에 가까스로 텐트에 도착해 엉금엉금 기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산소호흡기를 쓰고 아침까지 죽음 같은 잠을 잤습니다. 시샤팡마를 오를 때는 얼음덩어리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으나 포기할 수 없어 등정을 강행했던 적도 있고요.”

산에서 다른 산악인의 죽음을 맞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듭니까?
“K2에 오를 때인데, 위에서 ‘낙석!’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앞서 가던 팀의 셰르파가 옆으로 피하다 추락했어요. 에베레스트 등정 때는 앞서간 대구계명대 원정대 박무택 대원이 조난을 당해 숨진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어요. 자일에 매달린 채 숨을 거둔 그를 보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그런데도 그를 지나쳐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한동안 ‘독한 년’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가장 힘겨웠던 등정을 꼽으라면 언제입니까?
“마칼루봉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8400m 이상의 봉우리 중 처음으로 무산소로 등정한 것이 마칼루봉인데 정말 힘들었어요. 마지막에는 기다시피 했을 정도였는데, 정상 근처에서는 희한하게도 어디서 힘이 났는지 몸이 벌떡 서지더라고요. 마칼루봉을 오른 뒤 1주일가량 카트만두에서 쉬고는 곧바로 로체에 도전해 3박 4일 만에 올랐습니다. 날씨가 좋을 때 등정을 마치려고 첫날 캠프1은 생략하고 곧장 캠프2로 향할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이튿날 캠프3에 캠프를 치고, 그다음 날 마지막 캠프는 다른 팀이 쳐놓은 빈 텐트에서 몇 시간 쉬다가 바로 정상에 올랐어요. 그런데 정상에서 내려올 때 문제가 생겼어요. 올라갈 때 잠시 쉬던 캠프에 사람이 있어서 캠프3으로 곧바로 내려오는데 정말 죽기보다 싫더군요. 그때는 바로 옆으로 헛발을 디뎌 그대로 추락하면 편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었어요.”

정상에 올라서면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까?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안 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최고의 산행은 살아서 내려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이라서 빨리 내려가겠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또 정상에 올랐을 때 대부분 날씨가 좋지 않아 주위를 돌아봐도 보이는 게 없어요.”

하기야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찌 한가롭게 경치를 볼 여유가 있겠는가? 우리도 이제 정상이 바로 코앞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무판에 <불암산이여>라는 시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시를 쓴 사람이 방송인 최불암으로 적혀 있다. 그러고 보니 최불암 씨의 이름이 불암산과 똑같은 ‘불암(佛岩)’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이름은 실제로 불암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씨의 부친이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큰아버지께서 그가 오래오래 살기를 기원하면서 ‘불암’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다는 설명이다. 그 인연으로 불암산을 관리하는 노원구는 최씨에게 ‘불암산 명예산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드디어 해발 507m의 불암산 정상에 올랐다. 빗줄기가 더 거세진 듯했다. 마들 벌판 건너편으로 흐릿하게 북한산과 도봉산의 실루엣이 비쳤다. 수락산은 바로 옆에서 마치 형처럼 불암산을 내려다본다.

‘칸첸중가’ 등정이 의심된다고?
지금까지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등정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나요?
“남자는 라인홀트 메스너를 비롯해 20여 명입니다. 그중 한국인이 엄홍길·박영석·한왕용·김재수 씨 이렇게 네 명입니다. 여자로는 저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뿐이에요. 그동안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텐브루너, 이탈리아의 니베스 메로이, 그리고 한국의 고미영과 다섯 명이 선의의 경쟁을 벌여 언론에선 ‘5명의 소프라노’라고 부르기도 했죠.”

고미영 씨와는 인연이 각별했다고 하던데요.
“마지막 14좌인 안나푸르나에 함께 오르자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고미영 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안나푸르나에 오를 땐 고미영 씨의 사진을 품에 안고 올랐지요. 제가 고미영 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낭가파르밧 등정 후 하산길에서였죠. 고미영 씨는 저한테 축하 인사를 건넸고, 저도 고미영 씨에게 조심해서 올라갔다 와서 베이스캠프에서 보자고 했죠. 그런데 고미영 씨가 내려오다 사고를 당하고 말았죠.”

이쯤에서 오 대장에게 말 많았던 칸첸중가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본인으로서는 대답하기가 썩 유쾌하지 않겠지만, 이미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논란을 치렀으니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일로 많은 상처를 입어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만…(한동안 침묵). 밑에서 살피던 사람들이 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점이 고도 8450m입니다. 그 후 저는 안개 속 악천후를 무릅쓰고 계속 올라 3시간 40분 후 정상(8586m)에서 무전을 보냈죠. 일반 사람들은 정상에 올랐으면 반드시 맨 꼭대기에 서야 한다고 압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굳이 그곳에 오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수봉 정상에 섰다고 말합니다. 어떤 산악인도 그것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다른 등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다는 말인가요?
“1956년 칸첸중가 초등자들은 지역 주민의 요구로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상이 칼날 같아서 서 있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정상에 사람을 날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 때는 그 언저리까지 가도 정상 정복으로 인정합니다. 무엇보다 세계 산악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메스너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안나푸르나 등정 후 메스너를 만났는데, 메스너는 제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점은 자칫하면 강풍에 날아갈 수 있어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버틸 수 있는 곳이 못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제가 8450m에 있는 손톱바위 이야기를 하자, 거기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올 등반가는 없다며 제가 칸첸중가를 등정한 사실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정상에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책에서도 메스너는 저의 등정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의 의견을 일축했어요.”

오 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쉬 상황이 이해된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고 그가 말했다. 한국 여성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올랐다고 하면 모두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한국 사람이 먼저 나서서 굳이 “안 올랐다”고 주장하는지 그로서는 의문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데, 정상 바로 아래에서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이를 만났다. 거북바위다. 불암산이나 수락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라서 그런 이름을 가진 바위가 많다. 거북바위 옆 거북매점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끓인 라면을 먹으면서 출출한 배도 채우고 체온을 높인다. 임 부장이 산에 오르는 동안 <불암산 비와 안개>라는 시 한 편을 썼다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아까부터 잠시 걸음을 멈출 때면 전화기를 꺼내 뭔가를 기록하기에 산행 중에 무슨 문자를 그리 많이 보내나 싶었는데 그는 시상을 적어내리고 있었다.

“비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안개는 대지에서 올라간다
뿌연 구름 맑은 비 되고
비는 자유롭게 하강하나
온몸 으깨지고
안개는 숨가쁘게 승천하나
온몸 자유롭다
모처럼 몸 씻으신 부처님도
오늘은 말문 닫으시고
비와 안개가 들려주는
자연의 법문 들으신다”

정말 오늘 같은 날에는 부처님도 말없이 자연의 법문만 들으실 듯싶다. 비가 잦아들자 다시 길을 나선다. 불암산의 쌍둥이 봉우리를 넘으니 다시 비가 비스듬히 비껴 내렸다. 완전히 우중산행이다. 오 대장의 재미있는 산행 이야기를 들으며 발길을 내딛다 보니 어느새 숲길 아내로 배밭이 나타난다. 이제 오늘의 불암산 우중산행을 마무리할 때다.

그러고 보니 오 대장은 아직 미혼이라고 한다. 그는 산과 결혼이라도 한 걸까?
“그동안 열심히 활동하던 여성 산악인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 다시는 예전처럼 활동하지 못하더라고요. 1992년 가을에 한 남성을 소개받았는데 마음에 들어 세 번 만나봤지만 그 다음해 에베레스트 등반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결혼을 단념한 적이 있었죠. 그렇다고 영원히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고요. 아직 저를 이해해줄 남자를 못 만났을 뿐이죠.”

그렇군요. 이제 히말라야 14좌와 7대륙 최고봉도 다 올랐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책을 쓰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책을 완성하면 내년 봄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다시 오르고 싶어요.”
그의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여성의 섬세함으로 바라본 히말라야의 모습일까? 이미 세계 산악계의 새 역사를 쓴 오은선 대장은 올해 한국여성산악회장에 취임했다. 그가 걸어가는 한 발 한 발이 이제 세계 여성 산악인의 역사가 된다.

양승국

양승국(yangaram@korea.com) 1957년 서울 출생. 법무법인 로고스 파트너 변호사.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3회.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등 역임. 등산 마니아로서 산에 얽힌 역사 등 흥미로운 산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풀어낸 <양승국 변호사의 산 이야기>라는 저서가 있다.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moonpark@joongang.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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