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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나가수'만든 김영희PD "연예인과 밤샘 뒤풀이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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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51) MBC PD를 만났다.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대중에게 더 익숙한 스타 예능 PD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칭찬합시다’ ‘느낌표’ 같은 MBC 간판 프로그램을 맡았었다. 올봄엔 ‘나는 가수다’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김 PD 자신의 표현대로 ‘나가수 사건’에 의해 ‘나가수’에서 물러났다. 경선 탈락 가수에게 재도전을 허락하는 바람에 ‘원칙 훼손’ ‘공정성’ 논란을 일으켰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솔직했다. 스스로를 “영향력이 엄청나면서 제어장치가 없는 방송 권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이 일으킨 ‘안철수 신드롬’도 화제에 올랐다. 그는 “사회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치에 뛰어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최근 남미를 여행하고 왔다면서요.

 “‘나가수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제가 물러나게 됐잖아요. 공(功)은 공이지만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으니 회사(MBC)에서도 제게 미안했던 거죠. 회사에서 지원해줘 남미를 갔다 왔어요. 새로운 경험도 하고, 새로운 시각·생각 이런 게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남미 여행은 어떻게 했습니까

 “혼자 계획해 두 달 동안 배낭 메고 다녔어요. 통역·가이드도 없었고요. 혼자 여행하는 것은 이골이 났어요. 2004년 아프리카도 혼자 여행했고, 그 전에 유럽도 석 달 혼자 다녔었거든요.”

 그는 두 달 동안 스물아홉 번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비행기 내려 숙소 정하고 볼 것 보고, 다음 날 또 짐 싸 비행기를 탔다니까요.”

●왜 그렇게 숨 가쁘게 여행했습니까.

 “제가 쉬면서 널널하게 다닐 나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직은 힘이 있고 정신도 있으니까요. 이런 기회 얻기가 흔치 않은데 제대로 마음먹고 돌아다녀야 하겠더라고요.”

 그는 1960년생, 51세다. 다부진 체형이다.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답게 쌀 한 가마를 거뜬히 들 듯하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운동한다”고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가 봅니다.

 “방송 프로그램 만들 때도 그래요. 새로운 것을 하지 않으면 흥이 안 나요. 기존 프로그램을 조금 변형해 하면 가슴이 안 뛰어요. 이 나이에도 ‘나가수’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 생각을 하면 막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어요. 첫 방송 하기 전에는 잠이 안 와요. ‘이것 대박인데, 시청자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막 이래요.”

 김 PD에게 ‘나가수 후유증’을 물었다.

 “제가 잊혀져 가는 PD였는데 ‘나가수’ 때문에 다시 확 알려졌죠. 한동안 길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아는 척해 주시더라고요. 특히 ‘나가수 사건’ 이후에는 저한테 ‘힘내라’고들 하시더라고요. 제가 무슨 독립운동하는 사람도 아닌데(웃음).”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탈락 가수의 재도전’을 또 허용하겠습니까.

 “그럴 것 같아요. 하지만 시청자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밟겠죠. 지난번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그래도 김 PD에겐 슬럼프라는 게 없었죠.

 “딱 한 번 있었어요. 1995년 ‘TV파크’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제 프로그램 중 유일하게 실패한 프로입니다. 토요일 황금시간대였는데 5개월 만에 내렸죠. 연예인과 어린이들이 섞여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신문에서 막 두드려 맞았죠.”

●어떤 문제였죠?

 “요즘 아이들이 편식을 많이 하니까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게 해 보자는 취지였어요. 굉장히 좋은 시도잖아요. 그걸 재미있게 한다고 억지 구성을 하는 바람에 애들이 먹기 싫다고 막 울고 그랬어요.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런 장면을 빼야 했어요. 그런데 재미있게 만들려고 그 장면을 조금씩 살려 넣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 ‘아동 학대’라는 비판도 나왔죠. 그때 제가 충격을 받아 ‘PD라는 게 정말 중요한 건데 함부로 프로그램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나는 PD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죠. 심각한 고민에 빠져 현업을 떠나려고 했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송창의 선배(CJ E&M 본부장)가 직속 부장인가 그랬거든요. 제게 술을 사주면서 ‘오히려 너한테 잘된 거다. 너, 그동안 앞만 보고 계속 달렸는데 이런 좌절을 한번 겪어야 PD로서 성숙해진다. 틀림없다. 이 다음에 대박 날 거야, 걱정하지 마. 끝까지 해’ 이러시더라고요. 한두 달 뒤 저에게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맡기셨어요. 그러고 나서 ‘양심 냉장고’가 대박 난 겁니다.”

●애초에 ‘공익적 예능’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제가 입사해 예능 프로를 지원했어요. ‘예능이야말로 TV답다’는 생각이었어요. TV가 사실은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죠. ‘깊이 있는 걸 하려면 TV로 할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예능PD 선배들이 초년병인 저한테 ‘TV라는 게 한번 전파 쏘고 나면 다 날아가버리는 거야’ 이런 얘길 하시는데, 저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날아가버리는 게 아니고 좀 남을 수 있는 프로를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예능PD로서 여러 번 대박을 쳤죠.

 “PD로서 온 시청자가 정말 재미있게 생각하는 대박 프로를 내는 건 일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들죠. 저는 운이 좋아 그런 프로가 몇 개 있어요.”

 김 PD는 ‘영희’다. 최근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안)철수가 나오니 내일 영희도 나오겠네”라는 농담을 했다. 안철수 원장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가능성이 알려진 직후였다. 김 PD에게도 정치에 대한 꿈이 있을까. PD인 그의 영향력은 크다.

 “안철수 교수, 그리고 홍준표 의원 같은 정치인, 시민단체에서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 중에선 사회를 좀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정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분들은 자기 생각을 알리기 위해 ‘정치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고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제겐 TV라는 매체가 있잖아요. 정치인들이 대중을 향해,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들이는 노력의 10분의 1만 들여도 저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내가 굳이 정치를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겠죠.

 “맞아요. 동창 중에 ‘너는 권력이다. 너, 정신차려야 된다’ 이런 말을 가끔 해주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저 스스로 제어장치가 없어요. 그러니 정신차리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감성적인 사람이에요. 정치인들처럼 ‘사회가 이래야 한다. 재분배가 어떻게 돼야 한다’는 식의 표현을 못 해요. 대신 저는 ‘학생들은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 눈 못 뜨는 사람이 각막만 있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해요. 저는 우리 사회가 남들에 대한 배려, 남을 돌아보는 마음들이 있으면 굉장히 좋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별명은 ‘쌀집 아저씨’ … 촬영 뒤엔 한 명도 빠짐없이 회식

“녹화장선 내 말이 법 … 밤샘 뒤풀이로 하나 되죠”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답게 김영희 PD는 밥을 중요하게 여긴다. ‘학생들에게 아침밥을 꼭 먹이자’는 캠페인을 했던 그다.

 “우리 어릴 때는 먹는 게 중요했잖아요. 먹을 게 흔치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양도 풍족하지 않으니까 ‘어른부터 드셔야 된다’ 이런 것들을 교육 받고 자랐잖아요. 그런데 먹을 것이 풍부해질수록 사람들이 먹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생각할 필요가 없고, 너무 흔하니까.”

●매번 방송 촬영 뒤에 스태프, 출연자들과 꼭 뒤풀이를 한다면서요.

 “그럼요.”

●“스케줄 있다”며 뒤풀이에 빠지는 연예인들, 별로 안 좋아하겠습니다.

 “안 좋아하죠. ‘다 오라’고 그러죠.”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선장이잖아요, 대장이잖아요. ‘야, 와서 밥 먹고 가라, 한 명도 빠짐없이. 술 한잔 먹고 가라’ 하죠. 바쁜 스케줄이 있거나 꼭 가야 될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어요. 워낙 바쁜 사람들이니까. 그럼 ‘단 5분이라도 와서 같이 인사하고 사이다 한 잔이라도 먹고 가라’고 해요. 제가 그렇게 말하는데 안 올 이유가 없죠.”

●모든 PD가 다 그렇진 않겠죠.

 “제가 프로그램을 할 때는 제가 하는 말이 법이에요, 법. 헌법입니다. 새벽 2시가 됐든 3시가 됐든 제가 ‘밥 먹고 간다’고 하면 그게 법이에요.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요.”

●대단한 카리스마군요.

 “녹화 들어가기 전 방송국 복도에서 스태프끼리 하는 얘기 소리가 들려요. 서로 자기 말을 상대방이 안 들으면 ‘국장이 그렇게 하라고 그러셔’ 해요. 제 호칭이 방송국에선 국장님이에요. ‘국장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다’ 하면 자기들끼리도 다 통하는 거예요(웃음).”

●카리스마의 비결이 뭡니까.

 “주위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얘기를 따르면 대부분 성공하는구나. 싫어도 따라주자’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해요. 저도 ‘나가수’ 할 때 사실은 ‘이게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모르잖아요. 그런데 첫 녹화하기 두 달 전부터 저하고 같이 일하는 스태프, 가수들, 매니저들에게 ‘이건 반드시 성공한다. 내가 성공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라. 너희 도전이 헛되지 않게 반드시 해줄 거야. 걱정하지 마’ 이랬어요. 두 달 동안 세뇌를 다 시켜놨어요.”

●뒤풀이도 그런 확신을 공유하고, 세뇌하는 자리군요.

 “정확히 그렇습니다. 녹화를 마치고 나면 다들 지쳐 있죠. 그럼 제가 일부러 들으란 듯 ‘오늘 녹화, 아주 기가 막혔다. 대박 났다. 너 정말 아까 노래 잘하더라’ 이렇게 칭찬하죠. 그럼 다들 기분이 좋아져 밤새도록 술을 마셔요. 그러다 보면 완전히 한 팀이 돼요. 새벽 날 밝을 때까지 술 마시고 일어나는 순간에는 결속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죠.”

●그런데 채식주의자라면서요.

 “네. 이전엔 고기, 무지하게 먹고 좋아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육식이 안 좋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생각이 드는 날 바로 끊었어요. 대신 생선까지는 먹는 채식주의자예요. 한 10년 됐어요.”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나요.

 “제가 동네 쌀집 아저씨같이 생겼잖아요. 수염도 많이 기르고 야전 점퍼 입고 다녔죠. 그러다 보니 여자 코미디언들 사이에서 ‘야, 저 사람은 PD가 아니고 동네 쌀집 아저씨 같다’라고 했대요. 그러다 이경실씨가 방송하는데 갑자기 ‘쌀집 아저씨~ 쌀집 아저씨~’ 하고 불러 알려지게 된 거죠.”

●그 별명이 마음에 드세요.

 “최곱니다. 저는 그 별명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갈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아들딸이 아닐까요.”

 김영희 PD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은 대학 3학년, 아들은 대학 다니다 군대에 가 있다.

 “남미 여행 때 갈라파고스 군도를 갔다 왔어요. 갈라파고스에서 보니 ‘생명의 영속성’이라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를 생각하게 됐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들딸 낳고 하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나의 유전자(DNA)가 자식에게로 이어져 내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로 계속 살아남는 거잖아요. 제게 일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역시 제 아들딸이죠.”

자녀들도 방송에 관심이 있을까.

 “관심은 있는데 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맨날 밤새워 일하는 걸 보니까 하고 싶진 않겠죠. 그래도 딸은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들은 막 휴가를 나와 요즘 같이 술 한잔 하는 걸 즐기고 있습니다.”

j 칵테일 >> ‘화가 김영희’

김영희 PD가 남미 여행 때 가지고 다닌 공책(왼쪽). 자신의 신발, 시가를 문 남자,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우유니 소금사막, 빙하 얼음조각을 넣은 칵테일 마시는 자기 모습 등 김 PD가 그린 그림이 70여 점 들어 있다.

김영희 PD는 그림을 잘 그린다. 두 달간의 남미 여행에서도 70여 점의 그림을 현장에서 그렸다 한다. 여행 현장에서 그의 눈에 띈 풍경,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렸다. 남미 여행 때 그린 그림,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담아 조만간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j 와 인터뷰할 때도 자신의 그림을 들고 와 자랑했다.

●그림 그리는 습관은 어떻게 갖게 되셨어요.

 “증조할아버지께서 한량이셨어요. 산수화에 능하셨대요. 집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열두 폭 병풍이 있는데요. 그 병풍에 나오는 화폭이 증조할아버지께서 그리신 건데 정말 잘 그리셨어요. 그 재능을 제가 이어받은 것 같아요.”

 달리 미술을 배운 적도 없단다. 그런데도 김 PD는 중·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들로부터 “너는 미대를 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죠. 그런데 ‘몰래 카메라’ ‘느낌표’ 이런 프로그램을 하다가 세트 디자인을 제가 막 그렸어요. PD가 말로만 던져주면 디자이너들이 만들어야 되는데 제가 직접 그려주니까 디자이너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김 PD는 2004년 아프리카 여행 때도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이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는데, 귀국해 아프리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글을 써 보여주면 안 읽을 것 같아 스케치북을 두어 권 사가지고 거기다가 매일 그림을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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