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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력서에서 빠진 8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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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31면

내 이력서의 경력란은 만 25세부터 출발한다. 사무관으로 출발한 공직생활의 첫 기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적혀 있다. 그러나 공직에 몸담기 전 거의 8년에 이르는 직장경력은 어느 기록에나 빠져 있다.

가정형편상 진학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다가 강제 이주되어 성남의 천막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 셋, 할머니까지 부양해야 했던 가난한 소년 가장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만 열일곱 때였다.

은행에 들어가서 우쭐했던 기분은 곧바로 힘든 현실과 부닥쳤다. 열심히 일했고 나름 인정도 받았지만 ‘고졸’ 출신이란 벽이 높았다. 100m 달리기 시합에서 50m쯤 뒤처진 출발선상에서 뛰는 기분이었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반역’이 필요했다. 작은 돌파구는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마련되었다. 주경야독 생활을 하면서도 내 안의 타는 목마름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우연히 은행합숙소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시 잡지를 주워 읽고 시작한 공무원 시험공부는 또 다른 돌파구가 되었다. 하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결국 시험에 합격해 공직 발령을 받는 날에야 은행을 그만두었다. 만 스물다섯이었다.

그 후 삶의 궤적은 이력서에 그대로 나와 있다. 함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소년기에서 청년기에 걸쳐 있었던 내 인생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어쩌다 그 시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주저하지 않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행복했었다고. 그때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고. 너무나 어려워서 절망적이기까지 했던 상황이 인내와 감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고.

최근 은행에서 고졸 행원을 다시 뽑기 시작했다. 어린 신입 행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높은 대학진학률과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희망을 보는 듯하다. 없는 사람, 덜 배운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보다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 반역’을 도모할 수 있게끔 사회적 이동(social mobility)의 장치가 사회 곳곳에 만들어져야 한다.

우선 청년 일자리가 중요하다. 괜찮은 일자리가 많아지면 소득불평등이 낮아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아진다. 내년 예산을 편성하면서 일자리 창출에 가장 역점을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래의 주역인 청년층이 학력과 관계없이 창업과 창직(創職)을 손쉽게 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역동적인 우리 젊은이들에게 맞는 문화·관광 일자리, 국제개발협력(ODA)을 통한 글로벌 일자리 분야에 대한 지원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기회의 공정’ 또한 필요하다. 그래야만 경쟁도 의미 있게 이뤄지고 결과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빈곤의 대물림과 기회의 격차를 가져오는 가장 큰 고리는 교육에서 비롯된다. 없어서 못 배우는 사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취지에서 특성화고 지원이나 저소득층 장학, 선(先)취업 후(後)진학 지원 등 ‘교육 희망 사다리’ 사업은 계속 확대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인식과 관행의 변화다. 임금·승진 등에서 불합리한 차별이 없어지고, 학력(學歷)이 아닌 학력(學力)과 실력이 중시되어야 한다. 그럴 때 최근의 고졸 채용 확산이 일회성 문턱 낮추기에 그치지 않고 활발한 사회적 이동의 물꼬를 트게 만들 것이다.

최근에 입행한 고졸 행원들에게 내가 그 나이 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점을 하나 알려주고 싶다. ‘인생이란 달리기 시합’은 100m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보다 더 긴 장거리 경주라고. 남들보다 50m쯤 뒤에 출발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삶의 문리(文理)’가 더 빨리, 더 깊게 트여 약이 될 수도 있다고.

돌아가신 박완서 작가가 쓴 산문집 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제목이 있다. 멋진 제목이지만 거꾸로의 제목도 괜찮을 듯싶다. “지나온 길이 아름답다”고. 열심히 살면, 후회할 청춘도 아름답지 않은 인생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력서 경력란 맨 윗줄에 열일곱 살부터 했던 8년 가까운 고졸 은행원 경력을 떳떳하게 올리고 싶다.



김동연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으로 2008년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석·박사. 덕수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1982년 행정·입법 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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