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25주년 베트남…성장신화 흔들려

중앙일보

입력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치민) 시내로 몰려드는 베트남군의 탱크 굉음속에서 미 대사와 해병대 잔류병력을 태운 미군 헬기들이 대사관 옥상을 이륙해 남중국해 상공으로 빠져나갔다.

'골리앗' 미국과의 전쟁에서 '다윗' 베트남이 승리를 거두고 통일을 이룬 순간이었다.

25년이 지난 현재 베트남인들은 이제 '경제 전쟁' 을 치르고 있다. 가난과 고립을 벗고 21세기 변화의 물결에 합류하려는 몸짓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이념과 국가 정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도 만만찮다.

◇ 정체에 빠진 경제〓전후 10여년간 지지부진하던 베트남의 경제재건 노력은 86년 시장경제체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도이모이(개혁)' 정책의 채택으로 전환기를 맞았다.

경제개혁 조치에 힘입어 90년대 국내총생산(GDP)은 연간 6~9%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93년 58%에 이르던 빈곤선 이하의 인구는 98년 37%로 크게 줄었다. 특히 농업부문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기아(饑餓)가 사라졌고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경제는 최근 정체로 접어들었다. 98년 5%대를 기록한 GDP성장률은 지난해 4.8%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공식 통계로만 7.4%에 이르는 실업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매년 8% 정도의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직 1인당 GDP가 3백33달러(98년)선인 베트남인들로서는 갈 길이 먼 셈이다.

◇ 개혁의 지체〓베트남 경제가 정체에 빠진 가장 큰 요인은 외국인 투자의 급감이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주요 투자국인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돈줄이 끊긴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베트남 정부의 소극적 개혁자세가 지적되고 있다. 공산당과 정부의 경직된 자세가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9월 미국과의 통상협정 체결협상의 결렬. 아홉차례의 협상 끝에 어렵게 초안이 만들어졌지만, 공산당 정치국이 불공정성을 이유로 거부해버려 원점으로 돌아갔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6천여개에 이르는 국영기업들의 비효율성, 전근대적인 금융시스템도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 요소들이다. 비우호적 투자환경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으로 눈을 돌렸고, 이 때문에 지난해 외국인 투자규모는 전년에 비해 42%나 줄어들었다.

◇ 개혁이냐 통제냐〓개혁과 보수를 오가던 베트남은 97년 개혁파 보 반 키에트 대신 상대적으로 보수파인 판 반 카이가 총리직에 오르면서 개혁노선이 주춤해지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섣부른 개혁으로 옛 소련의 해체와 같은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국내여행 자유화.사상주입 교육 완화 등 제한적 개혁조치가 실시됐지만, 공산당 독재와 정치적 자유의 제한은 엄격히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물결은 높아지고 있다. 시장경제에 눈뜬 베트남 국민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국민성으로 부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에게 미국은 적국이 아니라 기회와 부의 나라일 뿐이다.

이들의 개혁요구가 급진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제적 개혁은 과감히 추진하되 정치적 개혁은 엄격히 통제한다' 는 공산당의 방침이 힘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7천9백만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전후 세대와 문자해독률이 90%에 이르는 높은 국민의식을 감안한다면 개혁의 목소리는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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