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학습효과’의 허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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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30면

개인투자자들이 농반진반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경제위기가 다시 오면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위기로 주가가 급락하면 과감히 주식을 사들여 대박을 노리겠다는 것이다. 과거 위기 때 주가가 ‘V자형’으로 급반등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경제위기 학습효과’다.

고현곤 칼럼

1997년 외환위기 때 주가는 반년 동안 53% 떨어졌다가 한 달 만에 54% 반등했다. 당시 한화증권 우선주를 주당 500원 언저리에 사들였다가 1만원에 판 투자자도 있었다. 무려 20배를 남겼다. 하지만 대다수 투자자들은 공포에 질려 기회를 잡지 못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주가가 한 달간 40% 떨어졌다가 열흘 만에 21% 반등했다. ‘경제위기가 다시 오면…’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투자자들은 이 기회를 또 놓쳤다. 스스로 새가슴이라고 탓했다.

다시 위기가 왔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과 유럽 재정위기로 이달에 코스피지수가 20%가량 떨어졌다. 학습효과 덕분인지 투자자들이 한결 대담해졌다. 개인투자자들은 외국인들이 주식을 대거 팔아 치운 지난 10일 1조5000여억원어치를 샀다. 하루 개인 매수로는 사상 최대다. 전문가들은 “약세장에서도 개인들이 흔들리지 않는다. 내공이 깊어졌다”고 치켜세웠다. 언론은 “부자들은 이런 때를 놓치지 않는다”며 불을 지폈다. 19일 코스피지수가 115포인트 하락했을 때도 개인들은 주식을 사들였다. 기관투자가들이 내놓은 IT(정보기술)주를 떠안았다.

이번에 개인들이 성공할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학습효과를 근거로 주식을 매매하는 게 맞는 건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증시가 특정 사안(경제위기)에 대해 같은 패턴(급락 후 급반등)을 반복한다는 가정하에 매매한 거다. 과연 그럴까. 주가가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면 이보다 쉬운 투자는 없다. 길목만 지키면 된다.

하지만 주가는 경제ㆍ정치 등 복잡한 변수에 따라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주가가 급락해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떨어질 수 있다. ‘V자형’ 반등이 아니라 ‘U자형’이나 ‘L자형’으로 질질 끌면서 투자자의 애를 먹일 수도 있다. 실제로 주가가 급락 후 급반등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29년 10월 미국의 대공황으로 다우지수는 32년 7월까지 하락했다. 그 뒤 반등했으나 52년 11월이 돼서야 대공황 전의 최고점을 회복했다. 23년이 걸린 것이다.

투자자들이 왜 근거도 분명치 않은 학습효과에 매달리는 걸까. 척박한 증시 풍토가 한몫 했다. 전문가들의 진단을 못 믿는 것이다.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은 전문가들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시류에 편승하는 부류다. 주가가 오를 때 장밋빛 전망을 내놓다가 떨어지면 어느 새 비관론으로 돌아서는 경우다. IT주를 사라고 했다가 말라고 했다가 시장 분위기에 따라 말을 바꾼다. 투자자들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부류다. 안팎을 둘러봐도 별로 좋은 게 없는데,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 아마 자신의 회사와 고객이 주식에 많이 투자하고 있어 자꾸 좋은 쪽으로 유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역시 투자자들에게는 참고가 되지 않는다. 이런 외로운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경제위기가 다시 오면…’이라며 자기주문을 외친다. 이번에 다시 위기가 오니 행동에 나선 것이다.

주식투자는 어차피 불확실성에 베팅하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경제여건이 좋지 않으면 주식투자로 돈을 벌 확률은 줄어든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때 한화증권 우선주로 대박이 난 건 전설 같은 얘기다. 운이 엄청 따른 경우다. 쪽박 찰 각오를 하고, 그런 투자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운이 좋으란 법은 없다.

이번 위기를 역이용해 이탈리아 국채를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재정위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이탈리아의 국가부채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109%에 달한다. 이탈리아 국채를 매입했다가 많은 이익을 남기는 투자자는 분명 그럴 자격이 있다. 하이 리스크를 무릅쓴 것이니까. 하지만 하이 리스크가 겁이 난다면 로 리스크를 택해야 한다. 증시에 ‘로 리스크, 하이 리턴’은 없다.

‘경제위기 학습효과’를 믿어보자고? 요행히 대박이 나면 좋겠지만,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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