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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함과 우아함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로 불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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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09면

1968년 무렵의 소설가 한무숙. [사진 중앙포토]

한무숙은 흔히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라 불리곤 한다. 미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19세기 영국의 ‘규수작가’ 울프와 여러모로 닮았다는 뜻이다. 한무숙이 199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꼬박 40년을 살았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전통 한옥은 지금 ‘한무숙 문학관’으로 꾸며져 그의 고고하고 우아했던 삶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혹독했던 일제시대와 6·25전란 그리고 그 이후의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또래의 한국인 대다수가 어둡고 괴로운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평생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타고난 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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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은 1918년 서울 통의동 유복한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신화의 단애’ 등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한말숙(1931~ )이 그의 동생이다. 일제 때 고위 경찰을 지낸 아버지의 덕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란 그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부산에 내려가 36년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한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요양생활을 하며 독서에만 몰두한다. 그가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쪽은 문학이 아니라 미술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여덟 살 때 베를린 세계아동미술전시회에서 입상할 만큼 뛰어난 재능이었다. 일본화가 아라이(荒井)에게서 사사하기도 한 그는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고작 19세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를 맡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40년 결혼하면서 한무숙은 화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시댁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두 살 위의 김진흥과 결혼했다. 김진흥은 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금융계에 투신해 주택은행장·신탁은행장을 지내기도 한 정통 금융인이었다. 미술에 대한 꿈을 접은 한무숙을 격려해 문학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한 것은 김진흥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김진흥은 아내와 함께 76, 85, 90년 세 차례에 걸쳐 ‘부부서화전’을 열기도 한다.

한무숙은 42년 ‘신시대’의 현상공모에 소설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돼 등단한다. 뒤이어 43년과 44년 ‘조선연극협회’의 희곡 현상공모에 ‘마음’과 ‘서리꽃’이 잇따라 당선하면서 문단과 연극계에서 동시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광복 후인 48년 국제신보의 장편소설 현상공모에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이후 6·25전란을 겪고 폐결핵의 재발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수많은 소설을 발표해 중견작가로 떠올랐다. 특히 57년 ‘문학예술’에 발표한 단편소설 ‘감정이 있는 심연’은 이를테면 그의 출세작이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보인 이 작품을 표제로 한 첫 창작집은 그에게 첫 문학상인 ‘자유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53년 휴전 후 서울 명륜동에 전통 한옥을 지어 이사하면서부터였다. 부산 피란시절부터 박화성·모윤숙·최정희·손소희 등 여류문인을 비롯해 여러 문인과 친교를 가졌던 한무숙은 명륜동으로 이사한 후 꽤 자주 문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모두가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에 한무숙으로부터 초대를 받으면 그날이 바로 생일이었다.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았던 몇몇 문인들은 술이 취하면 그대로 쓰러져 자고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문단의 대표적 기인(奇人)으로 꼽히던 천상병과 그 또래의 문인 두 사람 등 셋이 한무숙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술집에서 셋이 술을 마시다가 돈이 떨어져 무작정 한무숙의 집으로 쳐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한무숙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과 음식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 한 사람은 자리를 떴으나 천상병과 다른 한 사람은 더 마시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새벽녘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난 천상병은 희미한 불빛 아래서 더듬거리다가 한무숙의 화장대 위에 놓인 작은 병을 양주병으로 착각하고 그 속에 담긴 액체를 모두 마셔버렸다. 한무숙이 쓰던 향수병이었다. 술이 아직 덜 깼는지 향수 탓인지 천상병은 다시 쓰러졌고, 독한 향수 냄새 때문에 곧 식구들에게 발견됐다. 천상병은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위 세척 조치를 받아야 했다.

한무숙은 겉보기에는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복된 삶을 누렸으나 그의 삶이 그렇게 안락하고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따금 그를 괴롭혔던 폐결핵과의 잦은 투병도 그렇지만 70년 2월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을 겪는다. 미국에 유학 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레지던트로 일하던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한무숙은 실명을 하게 되고 뒤이어 척추 골절까지 겹쳐 여러 달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신앙과 의지로 극복해 시력도 얼마간 되찾고 이듬해부터 다시 창작에 몰두한다. 퇴원 후 첫 작품이 아들에 대한 뜨거운 모정을 그린 ‘우리 사이 모든 것이’였고, 뒤이어 실명 체험을 바탕으로 장애인의 세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조명한 ‘어둠에 갇힌 불꽃들’을 발표했다.

60대에 이르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학과 관련한 한무숙의 활동은 절정에 이른다. 구한말의 풍속, 의식, 언어들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생인손’(82년)과 조선조 후기의 천주교 박해와 지식인의 수난을 그린 장편소설 ‘만남’(86년) 등 후기의 대표작을 발표해 주목을 끄는가 하면 한국여류문학인회·한국소설가협회·가톨릭문우회 등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는 등 문단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미국의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에서 문학강연을 하기도 했다. 말년에 상복도 쏟아져 대한민국 문학상 대상, 3·1문화상 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한 뒤 93년 일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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