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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비극에선 모두 피해자“증오의 고리를 끊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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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05면

개봉 한 달 만에 관객 4만5000명. 1만 명만 넘겨도 ‘경사’로 치는 예술영화로선 ‘초대박’이다.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 누구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심장에 충격이 닥쳐오는 경험을 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잘 만들었지만 주인공 여성의 비극적 운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도 한다. 극찬이든 논란이든 어쨌든 이 영화, 관객들 입에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다. 메인 상영관인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는 주말마다 “오후 시간대 표가 매진됐으니 참고하시라”는 공지사항을 트위터에 띄울 정도다. ‘그을린 사랑’, 대체 어떤 영화기에.

개봉 한 달만에 5만 관객 넘보는 예술영화 ‘그을린 사랑’

광기의 역사에 희생된 여인
주인공은 나왈(루브나 아자발). 종교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기구하다는 표현이 미흡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겪어야 했던 여성이다. 나왈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애인을 잃는다. 배 속에 있던 애인의 아들은 출산 직후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세월이 흘러 나왈은 아들이 자라던 고아원이 폭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인과 아들의 복수를 위해 민병대 지도자를 살해한 나왈은 15년간 옥살이를 하며 수차례 성폭행을 당한다.

영화는 나왈이 쌍둥이 남매 시몽(막심 고데트)과 잔(멜리사 데소르모-풀랭)에게 남긴 유언으로 시작된다. 유언장의 내용은 쌍둥이가 죽은 줄 알고 있던 아버지와, 있는 줄도 몰랐던 형제를 찾으라는 것.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다니던 남매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 추리소설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조금씩 단서를 들춰내던 영화는 마지막에 급소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훅을 먹인다. 레바논 내전을 무대로 했지만 나왈이 사는 곳은 레바논·시리아·요르단·이스라엘 사이에 낀 가상국가 ‘푸아드의 계곡’으로 설정해 정치색을 최대한 탈색시켰다.

레바논 출신 극작가 와이디 무아와드가 쓴 ‘불에 그을린(Incendies)’이란 연극이 원작이다. 드니 빌뇌브(44) 감독은 200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연극을 봤다. 4시간가량 되는 긴 연극이었지만, “관객 모두 극장 안에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숨을 죽이고 봤다”고 회상할 정도로 극에 온통 빨려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빌뇌브 감독은 다른 관객들과 기립박수를 치면서 영화화를 결심했다. 원작자 무아와드는 그에게 “연극과는 전혀 다른,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5년이 지나 완성된 작품은 올 초 제83회 아카데미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토론토영화제와 밴쿠버영화제에서 최우수 캐나다영화상을 받았다. 폭력과 야만의 추악함을 조용하지만 힘있게, 간결하지만 똑바로 응시하는 화법은 영상 미니멀리즘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충격을 넘어서는 용서의 메시지
‘그을린 사랑’이 단시일 내에 입소문이 퍼진 건 일명 ‘식스센스급’ ‘올드보이급’에 해당하는 초강력 반전 덕이 크다. 씨네큐브 측에 따르면 반전이 공개되는 대목에 이르면 실제로 ‘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관객들이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한국 관객이 선호하는 ‘출생의 비밀’ 코드도 드라마적 재미를 쏠쏠하게 한 요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그을린 사랑’의 관객층 절반은 20~30대 관객이 차지한다. 보통 ‘중·장년층 여성’이 보는 걸로 알려진 예술영화로선 이례적이다. 젊은 관객들이 트위터를 중심으로 스포일러성 글을 단속하는 등 ‘자발적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도 흥행 요인이 됐다.

하지만 ‘초강력 펀치’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증오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무게감 있는 주제의식이 없었다면 이 작은 영화의 이변은 불가능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교수(대구사이버대)는 “한 여인의 지독한 비극이 지독한 경지의 용서로 마무리된다는 점,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결국 다를 수 없다는 점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심 교수는 또 “그리스 비극의 원형을 빌려왔지만, 결국 위대한 모성애와 가족 간의 용서를 다뤘다는 점도 훨씬 감동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소년 관람불가. 광화문 씨네큐브, CGV무비꼴라쥬(대학로·상암·강변·구로·동수원·오리), 대한극장, KT&G상상마당, 롯데시네마 아르떼(라페스타·센텀시티)등에서 상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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