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째 ‘아가씨’식상하긴요 요렇게 매끈한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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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도박사 스카이 역을 맡은 이용우(가운데 남자)는 현대무용 전공자답게 탁월한 춤솜씨를 과시한다. [사진작가 심주호]


어쩜 이토록 매끈할까. 얄밉도록 말이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작품이 처음 무대에 오른 건 1950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6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국내 역사도 꽤 길다. 83년 코리아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고, 이후 세종문화회관 등 에서 16번이나 공연돼 왔다. 90년대 초 남경주·최정원 등이 뮤지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아가씨와 건달들’을 통해서였다.

 친숙하지만 자칫 식상할지 모르는 레퍼토리. 하지만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2011년판 ‘아가씨와 건달들’은 이런 우려를 말끔히 날려보냈다. 최고가 13만원의 만만치 않은 비용임에도 객석은 연일 가득했다. 유료 객석 점유율 82%. 올 여름 최고 흥행작으로 우뚝 섰다. 손익분기점도 이미 넘어섰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뮤지컬의 교과서다. ‘지킬 앤 하이드’처럼 가슴을 후벼 파는 노래 한 곡 없고, ‘캣츠’ ‘오페라의 유령’처럼 관객을 압도할만한 무대 세트도 없다. 그럼에도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드라마·노래·춤의 절묘한 밸런스다.

 배경은 1920년대 뉴욕 뒷골목이다. 14년째 약혼만 한 라이브 여가수 아들레이드, 잔머리가 번득이지만 또한 덤벙거리는 네이슨, 냉혹한 면이 얼핏 보이면서도 흡인력 강한 스카이 등 각각의 캐릭터가 꿈틀댔다.

 무엇보다 노래가 나오는 타이밍, 즉 송 모멘트(song moment)가 실로 절묘했다. 예를 들어 1막 후반부, 서로 상극처럼 보이던 도박사 스카이와 선교사 사라가 맞닥뜨린다. 으르렁대던 두 사람, 하지만 노래엔 묘한 끈이 있다. 말로는 토닥거리던 둘 사이에 선율이 울려 퍼지자 묘한 감정선이 살아난다.

 그 선율이 노랫말에 옮겨 탔고, 그 가사에 진심이 묻어나오며, 짧은 방황과 부정을 오가다 마지막 순간, 둘은 진한 키스로 마무리를 지었다. 과연 음악이 아니었으면 이런 비논리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품엔 연극적 요소가 많았지만 ‘저 땐 정말 노래를 불렀을 거야’라며 고개를 끄덕일 만큼 드라마와 노래가 척척 버무려져 무대를 휘감았다.

 화려한 볼거리는 생각보다 적었다. 그 약점을 보완코자 16인조 라이브 밴드를 무대 2층에 배치했다. 밴드는 아들레이드가 노래를 부를 때나 쿠바 하바나 장면에선 또 하나의 출연진으로 탈바꿈했다. 지금껏 무대 밑에 숨어 있었던 뮤지컬 음악감독의 생동감 있는 지휘를 직접 목격하는 건, 관객으로선 새로운 경험이다.

 원작엔 없었던 도박사들의 남성 군무는 강화됐다. 춤꾼 이용우, 섹시 가이 김무열 등이 스카이 역으로 캐스팅 된 것도 작용한 듯 보였다. 말끔한 정장, 폭발적이면서도 절제하는 동작, 그 사이로 얼핏 비쳐지는 잔근육 등은 여성 관객을 매료시킬 듯싶었다.

 푼수로 천연덕스럽게 변모한 옥주현, 안정감 있는 음성의 정선아 등 여배우들의 연기 역시 뛰어났으며 커튼콜까지 깔끔했다. 9월18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5만∼13만원. 02-501-7888.

글=최민우 기자
사진=사진작가 심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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