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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암호해독 신의 영역 넘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생명의 비밀 푸는 야심적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세포에 있는 DNA 전체의 염기서열 32억 개 모두를 밝혀내는 대역사..6개국 연구원 1천여 명이 13년간 작업, 현재 3분의 2를 해독해냈다. 오는 6월쯤 초안이 완성되면 인류를 만든 프로그램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

의학은 혁명적으로 바뀌고 생명공학산업은 블루칩으로 떠오를 것이다. 유전자를 보고 건강을 예측할 수 있으며 유전자 조작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미리 태어날 아기의 성격·체격 등을 설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神을 대신해 인류를 개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때 윤리적인 딜레마에 봉착할 위험도 크다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 인간 게놈을 해독하는 경주의 선두를 달리는 다섯 연구소의 소장들은 전화로 연구 진척상황을 논의한다. 지난 3월 중순 그들은 또 하나의 중대한 이정표에 다가서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 이정표란 다름아닌 인간 DNA의 20억 번째 염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20억이라는 수의 일부는 중복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최종 목표인 32억 번째 염기에 도달하려면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분자생물학자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그레그 슐러는 지난 주말 지금까지 연구 결과중 겹치는 부분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가 컴퓨터로 명령을 입력하자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는 3월 9일 이미 20억 번째 염기에 도달했다는 계산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인간 게놈의 염기 첫 10억 개를 분석하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그 다음 10억 개를 해독하는 데는 넉 달이 걸렸을 뿐이다. 슐러는 그것을 “제2의 중간목표 돌파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20억 번째 염기는 바로 ‘T’(티민)이었다.

규모와 예산 면에서 사상 최대의 야심적인 HGP에서 20억 번째로 밝힌 염기가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올해로 13년째를 맞은 HGP에는 2억5천만 달러가 투입됐으며 6개국 16개 연구소에서 1천1백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20억 번째 염기에 도달했다는 것은 인간 DNA의 염기 서열을 전부 확인한다는 HGP의 최종목표에서 3분의 2 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HGP 과학자들은 민간 기업의 추격에 자극받아 분석 속도를 3배로 높여 한시도 쉬지 않고 1분당 염기 1만2천 개를 읽어나갔다. 3월 29일까지 HGP는 21억4백25만7천 개의 염기를 확인했다. 이 속도라면 올 6월 게놈의 90%를 99.9%의 정확도로 밝힌 ‘초안’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면 드디어 인간 생명의 청사진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하버드大의 생물학자 월터 길버트는 “인간의 조건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 생명의 청사진이 밝혀지면 의학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며 생명공학산업은 월스트리트에서 각광받는 블루칩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애플社가 1977년 첫 가정용 컴퓨터를 선보였을 당시 이베이(온라인 경매 사이트)나 아마존(서적·음반·비디오 온라인 판매 사이트)의 탄생을 예상한 사람이 없었듯이 인간 게놈이 완전히 밝혀짐으로써 인간의 생활방식과 인간에 대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의사들이 유전자를 바이오칩에 떨어뜨려 환자의 전립선암이 생명을 위협하는 암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확인하거나, 환자의 백혈병을 치료하는 데 어떤 약이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의사들은 우리 아이들의 유전자를 분석해 심장병이나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과학자들은 상처가 아물거나 아기의 손가락이 자랄 때, 대머리가 되거나 이마에 주름살이 잡힐 때, 노래를 배우거나 기억이 형성될 때,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거나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각각 어떤 유전자가 발현하는지 알아내고 이 유전자들의 조작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는 임신 전에 ‘설계’될 것이다. 고용주는 사전에 구직자의 유전정보를 입수해 그 DNA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고용을 취소할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인근에 있는 게놈 연구소 생어 센터의 존 설스턴 소장은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은 앞으로 수십 년, 아니 수백, 수천 년 동안 생물학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놈을 구성하는 염기는 ATGCCGCGGCTCCTCC…와 같은 식으로 배열돼 있다. 각 문자는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 분자를 뜻한다. 인간의 모든 세포는 동일한 DNA를 갖고 있다. 게놈은 어떤 種의 세포에 있는 DNA 전체를 의미한다. 유전학의 시대인 지금 동성애·모험심·수줍음·불안·암·알츠하이머 등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에 관한 연구결과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자 하나는 단백질 하나의 정보를 담고 있을 뿐이다. 염기 A·T·C·G 중 3개가 모여 유전암호 하나를 구성한다.

이 유전암호가 특정 아미노산 하나의 정보다. 예를 들어 TGG는 아미노산 중 트립토판에 해당한다. 이 아미노산이 이어진 가닥이 적당한 형태로 접히면 하나의 단백질이 된다. 음식물을 소화하는 효소,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 우울한 기분을 만드는 뇌 속의 화학물질, 2차 성징(性徵)을 나타나게 하는 성호르몬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유전자는 분자로 쓰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세포에는 약 8만 개의 유전자가 있으며 그중 99.9%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염기 1천 개중 단 하나의 차이가 수줍음 많은 배우 우디 앨런과 과격한 프로레슬러 스티브 오스틴의 차이를 나타낸다.

HGP를 추진한 과학자들은 초기부터 이 계획이 완성되면 생물학이 물리학을 앞질러 과학의 중심에 서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과학자도 HGP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美 에너지부에 갓 합류한 찰스 딜리시는 방사능이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맡았다. 1985년 10월 딜리시는 원폭 피해자들의 질병과 같은 유전성 돌연변이를 검사하는 기술에 관한 정부보고서를 읽을 때 HGP에 대한 발상이 떠올랐다. 돌연변이를 확인하려면 먼저 유전자를 해독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생물학자들이 염기서열을 확인하던 속도로는 영원히 이 작업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당시로서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계획을 세우고 과학자들이 HGP 추진 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과학자들로부터 성사될 가망이 거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생물학자들로서는 HGP가 결코 첫눈에 반할 만한 계획은 아니었다. 게놈의 97%(32억 개의 염기중 31억 개)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도 HGP에 대한 비판의 구실이 됐다.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염기서열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대다수 무의미한 DNA의 서열을 밝히느라 많은 노력을 투자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988년 주요 과학자들이 모인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HGP를 결의하고 미국 의회에서 예산을 따냈다. 당시에는 연구를 차분하고 꼼꼼히 진행해 2005년까지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98년 5월 J. 크레이그 벤터가 셀레라 제노믹스를 설립하면서 HGP를 앞질러 3년 내에 인간 게놈을 모두 밝히겠다고 선언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美 국립 인간 게놈 연구소(NHGRI)의 프랜시스 콜린스 소장은 연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예정 시간이 반이 지났지만 NHGRI가 밝힌 염기서열은 전체의 3%도 되지 않았다. 콜린스는 연구원들에게 이제부터 재확인 작업은 무시하고 어떻게든 빨리 염기서열을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98년 10월 콜린스는 2001년에는 첫 초안이 나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999년 3월에는 2000년 봄까지 끝낼 것이라며 예정시한을 앞당겼다.

인간 게놈을 완벽하게 확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매사추세츠 공대(MIT) 화이트헤드 연구소의 에릭 랜더는 그것을 1800년대 말 원소 주기율표의 발견에 견주었다. 랜더는 “게놈학은 생물학의 주기율표를 제공하고 있다”며 “과학자들은 기껏 CD롬 한 장 분량밖에 안되는 이 리스트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현재 환자들로부터 추출한 DNA에 형광색의 분자들을 접착시킨 다음 이미 알려진 1만 개의 유전자를 흩어놓은 유리 슬라이드에 그 샘플을 떨어뜨려 레이저로 읽어내는 ‘유전자 발현 검사법’을 실시하고 있다. 이미 알려진 유전자 중 어떤 것들이 환자의 DNA 샘플의 유전자들과 일치하는지 알아내는 방법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검사법으로 백혈병으로 의심되던 소년에게 근육 종양 진단이 내려졌고 서로 판이한 화학요법을 요하는 두 종류의 암을 구분해내는 성과를 올렸다. 스탠퍼드大의 패트릭 브라운은 어떤 유전자가 활성화되는지를 밝혀내는 발현 분석법으로 치명적인 전립선암과 생명에 지장이 없는 전립선암을 구분하고, 우울증 환자의 뇌 신경세포와 정상인의 뇌 신경세포를 구분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으로 내다봤다.

인류의 역사 역시 인간의 DNA에 기록돼 있다. 랜더는 “고대 페니키아 무역상들이 이탈리아 항구들을 드나들면서 남긴 후손들의 DNA를 염기서열상의 희귀한 차이점을 통해 식별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반투語를 사용하는 남부 아프리카의 렘바族이 2천7백 년 전 중동에서 이주한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구전(口傳)의 근거도 유전학적 데이터로 뒷받침된다. 또 아일랜드 코노트 지방에서 사는 주민 가운데 98%가 4천여 년 전 아일랜드에 당도한 수렵인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유전학적 데이터도 있다.

그러나 ‘생명의 책’을 해독하는 일은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한다. 유전정보에 관한 지식으로 인류를 원하는 대로 개조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깨진 접시를 새 것으로 갈기 위해 도자기 목록을 뒤지듯 생물학자들은 게놈을 신체 각 기관의 목록으로 사용해 예비 부모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녀에게 바라는 개인적 특성을 선택하도록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성격·체격·신장·인지력 등을 좌우하는 유전자에 관한 확실한 단서를 갖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미국의 아이비 리그 대학 출신 여성들의 난자(卵子) 시장이 선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근본적인 윤리 문제뿐 아니라 실질적인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일리노이 공대(IIT)내 시카고-켄트 법대의 로리 앤드루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변화를 가하는 일이 쉬워질수록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궁내 유전자 검사로 아둔함·비만·단신(短身) 등 현재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특성을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런 특성을 갖고도 결국 태어난 어린이들이 사회로부터 경멸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앤드루스의 조사에 따르면 이미 일부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출산 전 진단 가능한 선천적 결함을 지닌 어린이를 태어나게 한 부모들을 비난하고 있다. 머지않아 미용상의 결함에 대해서도 이런 비난이 쏟아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큰 우려는 많은 예비 부모들이 선의로 선택한 것이 결국 인류 전체에 예측 못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다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주기도 한다. 일례로 겸상(鎌狀)적혈구 빈혈증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력을 준다. 따라서 ‘나쁜’ 유전자를 없애는 행위가 인류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일이다.

HGP 초창기부터 윤리학자들은 유전학적 지식이 보험과 고용 부문에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유전자 검사에서 혈액색소침착증을 일으키는 유전 표지(標識)를 지닌 것으로 판명된 한 남성은 완치가능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보험회사는 그가 치료를 중단하고 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보험 계약을 취소했다.

또다른 남성은 고용 前 신체검사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는 건강했지만 신장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한 회사의 행정 책임자였던 테리 사전트(43)는 지난해 12월 신체검사에서 자신의 남자 형제 목숨을 앗아간 유전자형 질병에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예방 치료를 시작했지만 회사는 결국 그녀를 해고했다.

현재 미국의 39개 州가 유전자 검사를 바탕으로 한 건강 보험상의 차별을 부분적으로나마 금지하고 있으며 15개 州는 몇몇 고용차별을 법으로 금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법 가운데 다수에 허점이 있으며 고용주들은 여전히 직원들의 유전 정보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1999년 미국 경영협회(AMA)의 한 조사에서 미국 중·대형 기업의 30%가 직원들의 유전 정보를 입수하고 있으며 7%는 그 정보를 고용과 승진에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콜린스는 “유전자 정보가 흔해짐에 따라 악용될 소지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HGP의 완성(염기서열의 확인 차원을 넘어 모든 유전자의 기능을 파악하는 단계)이 인간의 정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가 가장 큰 미지수다. 우선 성격·지능 등 개인적 특성뿐 아니라 심지어 신앙까지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고지식한 생물학적 운명결정론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쌍둥이들에 관한 여러 연구에서는 심지어 사형에 대한 찬·반 성향까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콜린스는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결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게놈의 영향력과 한계에 대한 판단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대는 이미 세워졌고 출연자들도 대기중이다. 거액의 자금이 투입된 장기간의 연구 끝에 드디어 후대에 ‘게놈 세기’의 태동기로 기록될 역사적 무대의 막이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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