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을 말한다]-스파이크 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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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흑인의 시각에서 흑백 인종갈등에 천착해왔던 미국의 스파이크 리 감독이 처음으로 인종문제에서 벗어나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한때 나는 자식들에게 디즈니영화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는 그의 말처럼 인생의 성숙에 따른 방향전환인가.

이 영화 발표 후 리 감독이 각종 매체에 밝힌 내용을 종합해 감상포인트를 듣는다.

1977년 여름 뉴욕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만큼 사건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나 살인범을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사건으로 야기된 약탈과 광란, 디스코와 펑크록 간의 갈등, 섹스 등 인간의 광기가 주요 테마다.

예컨대 '샘의 아들' 로 불렸던 연쇄 살인범은 따로 있는데 뉴욕의 젊은이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것도 그런 광기의 한 예다.

광란에 휩쓸렸던 어느 여름에 관한 '기록' 이라고나 할까. 살인범으로 3백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데이비드 버코비츠(47)도 그 광란에 원인제공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범죄가 사람들에게, 작게는 뉴욕 브롱크스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크게는 8백만 뉴요커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좀 더 과장한다면 전세계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나 할까. 아울러 방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재조명하고자 했다.

그때 방송은 연쇄살인을 드라마처럼 다룸으로써 뉴요커들의 광기를 부채질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사건은 내 인생을 바꿔놓기도 했다. 처음으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혼란의 와중에서도 슈퍼8㎜ 카메라를 들고 약탈과 디스코댄스, 이웃들의 파티현장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 필름이 내가 학생신분으로 처음 발표한 영화 '브루클린에서의 마지막 허슬' 의 토대가 됐다.

나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된 사건인 만큼 작품 연출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고 봐주면 고맙겠다.

이 영화로 희생자 가족들에게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해 미안하다.

그 아픔은 40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할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이 슬프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제 뉴욕의 역사이지 않은가.

솔직히 이 영화는 나 스스로의 '칼질' 로 자극성과 폭력성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밝히고 싶다.

또 한가지 지금까지 발표된 내 영화가 미국내 3천5백만 흑인들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도록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흑인들은 오랜 세월 무시당했을지언정 그런 짓을 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다는 점을 꼭 밝혀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에는 인종적 다양성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흑인감독으로서 백인배우들이 주요 역할을 맡는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는 비판도 있겠지만 나마저 흑인이야기를 외면한다면 정말 할리우드에는 흑인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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