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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17> 남해 바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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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는 섬이다. 원래는 남해도 하나였는데 지금은 창선도와 이어져,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큼지막한 섬 두 개가 날개 펄럭이는 나비 모양을 이룬다.

섬이면 거제도나 강화도처럼, 남해도라 불러야 마땅한데 우리는 남해라 부르고 만다. 뒤에 섬 도(島) 자를 뺀 이유는 뭘까. 남해에 들어갈 때마다 일었던 의문이다.

남해는 여행기자의 단골 여행지다. 고운 백사장 자랑하는 해수욕장도 즐비하지만, 여행기자는 봄 마중 나가면 꼭 남해를 들어간다. 남해 바다만큼 여름과 어울리는 풍경도 흔치 않지만, 여행기자는 남해 하면 먼저 봄부터 떠올린다.

언제 가더라도 남해에는 어김없이 시퍼런 기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불끈불끈 힘이 솟는 그 기운 앞에서 남쪽 바다 남해(南海)는 쪽빛 바다 남해(藍海)가 되어 일렁인다.

남해에도 트레일이 있다. 남해 주민이 힘을 합쳐 조성한 남해 바래길이다. 올 1월 보리암 오를 때 봐두었던 길인데, 부러 여름에 맞춰 걸었다. 여름 남해의 모습을 전하고 싶어서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남해 바래길은 시퍼런 남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가파른 해안 절벽을 따라 걷는 길이다. 이 절벽 아래 옛 어미들이 물질을 하러 가던 길이 있다. 남해 바래길 1코스 가천 다랭이마을 탐방로에서

#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기하학 - 바래길과 다랭이논

이번에도 이름에서 시작하자. 바래길. 해안선 길이가 300㎞가 넘는 남해에 난 길이니, 바다를 끼고 도는 길은 분명할 터이다. 그래서 바래길이 됐으리라 짐작부터 하고 본다. 그러나 어설픈 짐작은 바래길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나면 머쓱해진다.

 바래길은 아낙들이 갯벌에 일하러 가던 길이고, 주린 배 움켜쥐고 물질 나간 어미 기다리던 자식의 길이다. 옛날 남해의 어미는 갯벌에서 갯것 캐는 일을 ‘바래한다’고 했다. 바래길이 여기서 나왔다. 그럼, 바래는 무슨 뜻일까. 갯벌이 발달한 우리 서남해안 쪽에서는 갯벌을 밭이라고 종종 부른다. 갯벌에서 일용할 양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래’의 어원은 아마도 밭일지 모른다. 밭에 가는 길, 바래길은 남해식 출근길이다.

 남해는 예부터 살림이 궁했다. 섬이라기보다 바다에 불쑥 솟은 산에 가까운 남해에서 수평의 영역은 드물었다. 지금도 남해의 논과 밭과 집 대부분이 산비탈에 겨우 기대어 있다. 이 가파른 비탈에 어떻게든 씨를 뿌리려던 흔적이 다랭이논이다. 남해 남쪽 기슭 가천마을의 다랭이논은 그 기하학적 아름다움 때문에 진즉에 관광명소가 됐지만, 실은 남해 사람의 궁핍하지만 절절한 삶이 층층이 쌓인 애환의 현장이다.

 층층다리 계단식 논을 뜻하는 다랑(이)논도, 다랑논만 108개나 된다는 가천마을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분화한다. 삿갓 하나 얹으면 논이 사라진다는 삿갓배미, 치마 한 폭 얹을 만한 크기라는 치마배미, 여인의 눈초리처럼 가늘다는 반달매미, 전통악기 장구 모양이라는 장구배미 등등, 언뜻 해학이 읽히기도 하지만 이름에 저민 서글픈 기운은 씻기지 않는다. 하나 지금은 가천마을도 젊은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오랜 세월 힘겹게 빚어낸 몇 뼘의 땅마저 태반이 놀고 있다.

 남해의 땅은 비좁은 데다 척박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여수 똥배’라는 게 생겼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수에서 인분을 가득 실은 배가 남해에 왔다. 그 인분을 남해 사람들은, 삿갓 만하고 치맛폭만 한 논밭에 뿌렸다. 여수 사람의 인분이 남해에 와서 거름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게 남해 사람은 다랭이논을 일궜다. 남해 사람을 보고 ‘똥배 기질’이라 하곤 하는데, 그 기원이 예 있다.

 남해 바래길이 서러운 건, 어미가 일하러 나가는 길이어서다. 남해 바래길이 안쓰러운 건, 여수 똥거름 뿌려 일군 삿갓 만한 밭뙈기 두렁을 잇고 있어서다. 남해 바래길을 걸을 때는, 눈 앞에 펼쳐진 쪽빛 바다에만 시선이 두지 말아야 한다. 두 발 디디고 서 있는 땅을 바라봐야 한다. 부대끼는 남도의 삶을 들여다 봐야 한다.

남해 바래길 2코스에 있는 신전숲에서.

남해 바래길 2코스에 있는 논길 앞에 보이는 바다가 앵강만이다.

# 어느 외로운 죽음을 기억하다

남해 바래길은 현재 모두 8개 코스가 있다. 1코스부터 4코스까지는 남해 남해안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고, 5코스는 내륙을 관통하며, 6코스부터 8코스까지는 남해의 동북해안을 따라 창선·삼천포대교까지 나아간다. 8개 코스 중에서, 남해 바래길을 상징할 수 있는 1코스와 2코스를 돌아다녔다.

 1코스와 2코스를 가르는 경계가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가천마을 왼쪽으로 평산항까지 16㎞ 길이 1코스고, 오른쪽으로 벽련마을까지 18㎞ 길이 2코스다. 1코스가 ‘다랭이 지겟길’이란 이름처럼 바래길의 본령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면 2코스의 주인공은 앵강만이다. 2코스는 섬 깊숙이 파고든 앵강만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덮어씌우듯이 에두른다.

 앵강만(鸚江灣)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다. 앵무새가 우는 강, 다시 말해 앵무새 우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바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앵강만은 잔잔하고 평화롭다. 앵강마을을 바라보는 해안가 마을도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앵강만 어귀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섬이 있다. 노도. 이 섬에서 앵강바다처럼 숨 죽이고 살다 간 사람이 있다.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1637~1692)이다. 서포는 숙종 연간인 1689년 남해로 유배됐다가 3년 뒤 남해에서 죽었다. 서포가 남해에 내려왔다는 기록은 있어도 노도가 유배지였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노도 주민 사이에 ‘노자묵고할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어느 날 한 할아버지가 노도에 들어오더니 온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 노도 주민이 ‘놀고 먹는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노자묵고할배’라 부르곤 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서포라는 주장이다. 지금 노도에는 서포의 허묘(虛墓)와 서포가 마셨다는 샘터가 남아 있다. 서포는 남해에 내려와 수십 수의 시편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사친시’는 지금 읽어도 목이 멘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졌던가/문집 중에서 남쪽 바다에서 쓴 시는 응당 빼버려야 하겠구나’

 조선 3대 문장가로까지 추앙받던 서포는 왜 남해에서 쓴 시를 버리려 했을까. 절박한 삶 앞에서 문학 따위는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서포는 홀로 쓸쓸히 죽었다.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진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서포는 덜 외로웠을까. 바래길 2코스를 걷는 내내 노도가 눈에 밟힌다. 길은 평온한데, 걸음은 자꾸 무거워진다.

 ● 길 정보 남해 가는 길이 짧아졌다. 순천완주고속도로 개통 덕분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익산IC에서 포항익산고속도로를 약 10㎞ 탔다가 순천완주고속도로로 진입해 순천IC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탄다. 이 경로를 따르면 예전의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 경로보다 한 시간 가까이 단축할 수 있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30분쯤 달리면 남해군청에 도착한다. 남해 바래길은 이정표가 많지 않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되면서 이제야 본격적인 탐방로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래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지정 탐방로가 아니어도 바래길 본래의 정취는 곳곳에 남아있다. 남해 읍내에 있는 남해유배문학관(yubae.namhae.go.kr)에 가면 서포를 비롯한 유배 문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남해 바래길 인터넷 카페(cafe.naver.com/barearoad), 남해 바래길 사무국 055-863-8778.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남해 바래길’ 영상을 중앙일보 인터넷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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