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젤 워싱턴 - 불같은 영혼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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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올해 가장 행복한 배우는 〈허리케인 카터 The Hurricane〉의 덴젤 워싱턴이 아닌가 싶다.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에 이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남우주연상), 그리고 오는 24일 열리는 아카데미에서도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중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10년전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10년 전 베를린 영화제 전에〈영광의 깃발 Glory〉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를 수상했다.)

54년 뉴욕주 마운트 버넷에서 태어난 덴젤 워싱턴은 포드햄대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아메리칸 컨서버토리 시어터에서 셰익스피어로 연기실력을 다진 후 81년 〈카본 카피〉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후 스파이크 리의 〈모 베터 블루스〉(90년),〈말콤X〉(92년), 그리고 〈허리케인 카터〉(99년)까지 영화를 통해 흑인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배우중 한사람이었다.

덴젤 워싱턴은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덕분에 단란한 가정과 두터운 신앙, 그리고 성실함까지 성공한 흑인배우들이 지닌 대부분의 것을 지녔다. 이런 미덕은 곧 헐리웃 영화의 주류 배우로 성장하는 큰 밑거름이 됐다.〈크림슨 타이드〉(94년),〈커리지 언더 파이어〉(96년),〈가상현실〉(96년),〈본 콜렉터〉(99년) 등 자본 규모가 큰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 몸(?)하는 배우로 대접받았으며 '할리우드의 검은 영웅'이란 칭호를 받으며 탄탄대로를 달려왔다.(하지만 실망스런 작품이 더 많았다.)

덴젤 워싱턴은 〈본 콜렉터〉의 실망스런 연기 이후〈허리케인 카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허리케인 카터〉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혼신의 연기 덕분이다.〈말콤X〉에서 흑인 인권운동가로 열연했던 이후 오랜만에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과 연관된 역을 맡았기 때문일까?

영화〈허리케인 카터〉는 살인 누명을 쓰고 2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흑인 복싱 선수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허리케인은 11살 때 백인 성추행범을 칼로 찔러 소년원에 수감됐고, 그로부터 17년 후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모든 사건은 흑인을 경멸했던 델라 페스카 형사에 의해 조작되었지만, 미국 사회는 이 모두를 함구했다.

하지만 허리케인은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담아〈제 16 라운드〉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 책에 감동받은 레스라와 그의 친구들은 허리케인 구명 운동을 펼쳤다. 처음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레스라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던 허리케인도 결국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어릴적 미국 남부를 여행하면서 인종차별 현장을 목격했다. 식당은 물론 화장실도 구분돼 있었으며 심지어 호숫가조차 흑인이 놀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은 과거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고통이다. 내가 배우로서 웬만큼 얼굴이 알려진 다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뉴욕에서 택시 기사로부터 승차를 거부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을 정도다." 그가 말하는 차별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런 그에게〈허리케인 카터〉는 큰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런지〈허리케인 카터〉는 덴젤 워싱턴을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그는 92년 원작〈제16라운드〉를 읽고 영화로 만들어질 순간만을 고대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노먼 주이슨 감독은 "내가 만난 가장 열정적인 배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덴젤 워싱턴은 허리케인 카터를 닮고자 프로권투선수를 섭외해 6개월의 혹독한 훈련을 거쳤고 그 덕분에 몸무게도 40파운드나 줄었다.

현재 그는 신작〈타이탄을 기억하라 Remember the Titans〉에 온 열성을 쏟고 있다.〈타이탄을 기억하라〉는 1971년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의 통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핵심도 인종문제이다. 여기서 덴젤 워싱턴은 정열적인 미식축구 팀 코치 역을 맡았다.

일찌기 '밥 딜런'은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허리케인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것이 바로 허리케인의 억울한 스토리... 죄를 짓지 않았지만 사법당국은 그에게 족쇄를 채웠고, 챔피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감옥에 투옥되었네..." 이제 덴젤 워싱턴이 그 노래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루빈 허리케인 카터가 백인이었다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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