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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감싼 보랏빛 향기, 유럽인 마음을 사로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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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08면

1 시미안 라 로통드 마을 앞에 펼쳐진 라벤더 밭.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여름 휴양지는 어디일까? 바로 프로방스다. 니스나 칸 등 코트다쥐르의 유명 도시를 포함하는 남프랑스 7개 주를 일컫는 프로방스는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영국 왕실은 물론 상류층의 휴양지로 각광받아 왔다. 바캉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 중순부터 프로방스로 향하는 도로는 유럽 각지에서 넘어온 캠핑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다.

남프랑스 프로방스 작은 마을의 라벤더 기행

2 프로방스의 여름밤을 향기롭게 취하게 하는 로제 와인들. 타벨은 로제 와인의 특급 산지다

그런데 최근 프로방스의 휴양지 트렌드가 많이 바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니스·칸·생 폴·앙티브·상 트로페 등의 바닷가만 붐볐다. 하지만 요즘엔 프로방스 내륙 산악지대의 조그만 시골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축제의 도시 아비뇽이나 오랑쥐에서 한두 시간 정도 떨어진 뤼베롱 산악지역에 위치한 고르드·본뉴·메네르브·루쉬옹 같은 한적한 시골마을이 ‘핫 플레이스’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화려한 코트다쥐르의 도시들을 제쳐두고 무료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산골 마을들로 몰리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프로방스의 정수는 니스나 칸 같은 바닷가 도시보다는 뤼베롱과 알피유의 산악 지역, 혹은 바르 주의 조그만 시골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 상대의 장삿속보다 프로방스의 햇살과 바람, 토양에 순응하며 대를 잇고 살아가는 전원적인 삶이 있는 곳. 알퐁스 도데나 장 지오노, 마르셀 파뇰의 소설에 나오는 바로 그 프로방스다.
프로방스에는 두 가지 여름의 향기가 있다. 하나는 물론 바다의 향기다. 낭만적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지중해와 그 위의 요트들, 해변의 예쁜 집들, 해안도로의 하늘거리는 종려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바다 내음이다.

또 하나는 내륙의 깊숙한 시골에서 퍼져 나오는 대지의 향기다. 파란 창문과 파스텔 톤의 외벽, 그리고 붉은 기와의 집들, 군데군데 온갖 꽃들이 만개해 있는 골목길, 작은 마을 중심의 소박한 분수와 샘, 원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예쁜 그릇들과 옷감, 빈티지 풍의 가구들, 작열하는 태양과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 한적한 시골길 혹은 들판을 가득 덮은 야생화…. 그리고 그 안쪽의 땅에서 프로방스를 가장 프로방스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라벤더다.

3 2000년이 넘은 오랑쥐 원형극장. 오페라 공연을 듣기 위해 모인 관객들.

라벤더(프랑스어로는 라방드)는 프로방스의 척박한 땅, 자잘한 돌들이 너무 많아 농사 짓기에는 너무 황폐한 그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지구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사해준다.그런 점에서 라벤더는 와인과도 닮았다. 우리의 삶에 때로 예상치 못한 감동의 향기와 미감을 전해주는 그랑 크뤼(Grand Cru)급 와인들이 자갈밭처럼 거친 토양에서 자라난 포도에서 나오듯, 라벤더 역시 대지의 황폐함을 딛고 일어서 그 찬란한 빛깔을 피워낸다.

프로방스의 백미는 라벤더와 클라리 세이지를 위시한 각종 허브다. 특히 라벤더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발렝솔 평원을 가면 보라색 지평선과 보라색 바다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런 허브는 단순한 관상용 식물이 아니라 프로방스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일생에 걸쳐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프로방스의 알프 드 오트 프로방스, 보클뤼즈, 라 드롬 프로방살의 3개 데파르망에서는 대략 매년 2만헥타르 면적의 라벤더를 재배한다. 2만 헥타르는 60억 평이 넘는 넓이다. 이 3개 데파르망에서 생산하는 라벤더 에션셜 오일은 전 세계 생산량의 90%에 달한다. 라벤더 투어의 거점도시로 오랑쥐를 추천한다. 아비뇽은 여름 축제 동안 너무 번잡하기도 하고 호텔비와 물가도 비싸다. 그러나 오랑쥐는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날만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한적하다.

오페라는 해가 떨어진 오후 9시30분부터 이천 년이 넘은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에서 공연된다. 옥타비아누스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다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극장은 로마 시대의 유적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건축물이다. 길이 103m, 높이 36m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의 무대 외벽뿐만 아니라 그 한가운데 높이 4m의 커다란 아우구스투스 석상도 늠름하다. 파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상이다. 이 장식 벽에 대해서는 루이 14세도 “내 왕국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벽”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천 년이 넘은 유적에서 듣는 한여름밤의 아리아는 정말 황홀 그 자체다. 필자는 오페라 관람을 위해 두 달 전 오페라와 호텔 예약을 마쳤다. 미리 해두지 않으면 표는 물론 숙박업소도 모두 동이 나서 없기 때문이다. 오페라 예약은 www.choregie.com에서 할 수 있다.오랑쥐를 거점도시로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코트 드 론을 대표하는 명성의 와인 산지들이 거의 이 도시 주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아는 샤토뇌프 드 파프, 보카스텔, 타벨, 리라크 등의 명품 포도밭이 오랑쥐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펼쳐진다.

그래서 프로방스의 여름은 라벤더와 향긋한 복숭아 아로마의 로제 와인, 그리고 오페라 아리아가 어우러지는 환상의 결합이다. 만약 당신만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지금 당장 프로방스의 라벤더 투어와 오랑쥐에서의 오페라 감상을 적어 넣기를 ‘강추’한다.


‘시사저널’ 등에서 16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51개국을 여행했다. 창조적이고 인문학적인 ‘컬처 투어’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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