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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이 사랑한 법정 ‘무소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8호 31면

어떤 부자 노인이 자녀들의 끈질긴 청에 못 이겨 일생의 피와 땀이 얼룩진 재산을 미리 나눠 줬다. 자식들의 논리는 아주 그럴듯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당연히 유산을 남겨 주실 텐데,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 많은 유산이 세금이다 뭐다 해서 많이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사업에 쪼들리는 자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재산에도 손해가 없으니 일거양득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자식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 집을 찾았다.

삶과 믿음

그런데 재산을 나눠 준 그 다음 해 노인은 몹쓸 병에 걸려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게 됐다. 자식들에게 가진 재산을 다 나눠 준 노인은 이제는 하루하루 병원 입원비를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에 다시없는 효자 노릇을 하던 자식들은 발걸음을 끊고 병든 아버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자식들의 배신에 담당 의사가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돌아가실 게 뻔한데 뭐 하러 생돈을 쓰느냐는 것이 똑똑한(?) 자녀들의 생각이었다. 오래전 한 선배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돈과 부자지간 도리를 맞바꾼 자녀들은 그 후로도 잘 살고 있을까.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전해 듣지 못했지만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행복과 돈의 관계는 언제나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빈곤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단계를 벗어나면 물질적인 성장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된다.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세계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도 물질적 성장만큼 함께 높아지지는 않았다. 빈곤국이지만 방글라데시나 부탄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오히려 높다는 조사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복권 1등 당첨자들을 추적해 본 결과 대부분이 새로운 삶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지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더라고 한다. 도피나 이혼, 사기나 도박, 탕진의 순으로 결국에는 가족과 건강을 잃고 복권 당첨 전보다 불행한 삶을 살더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될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고 경고한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몸과 마음을 망치며 파멸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소유가 그렇다. 경제적 재화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도 마찬가지다. 가지고 싶은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진정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신학대 1학년 때 학보사 선배에게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였다.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은 소유하고 싶다’고 추천사를 썼던 바로 그 책이다. 나는 처음엔 조금씩 슬금슬금 읽다가 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 읽어 내렸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가정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가 가짐을 당하게 된다’. 스님의 명쾌한 말씀이 오랫동안 맴돌았던 기억이 새롭다.



허영엽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문화홍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서에 관해 쉽고 재미있는 글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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