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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계 할리우드화 우려"

중앙일보

입력

지난 10일부터 사흘간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아시아감독 3인전' 이 열렸다. 형식적으로는 드라마 위주의 할리우드식 영화만들기를 거부하고, 내용적으로는 대부분의 영화가 외면하는 사소한 일상이나 누추한 것들에 주목하는 세 감독이 초청됐다. 한국의 홍상수(40).일본의 이시이 소고(石井聰瓦.43).대만의 차이밍량(蔡明亮.43). 마지막 날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예의 명민함으로 기자를 사로 잡았다.

차이밍량은 후샤오시엔(侯孝賢.53).에드워드 양(楊德昌.53)과 함께 대만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말레이지아에서 살고 있다. 그의 태생지다. 20세에 공부하러 갔다 눌러앉은 대만. 그러나 이제는 대만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을 보낸 대만은 내게 익숙하다. 익숙한 것에 의지하려는 내 성격때문에 대만은 작업하기에 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대만의 사회 변화가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걸 방해한다.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그는 동성애자다. '애정만세' '하류' '구멍' 등 그가 만든 몇 안되는 영화들에서는 동성애의 코드가 항상 들어 있다. 아마 대만의 보수적인 분위기로서는 동성애자가 유명 감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게다. 그렇지만 돌아온 고향도 살갑지는 않았다.

"오래 떠나 있은 탓인지 굉장히 이질적이다. 말레이지아에는 인도네시아아.네팔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에게서 오히려 동질감을 느낀다. 사회와 동화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내 입장과 닮았다. 그래서 이들과 친하게 됐다. 다음 작품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다."

어느 한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경계인, 주류가 멀리하는 마이너리티. 차이밍량이 처한 조건은 그를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로 만들었다.

"디지털 카메라 등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느냐" 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최근 디지털 카메라를 한 대 구입했다. 메고 다니다 찍고 싶은게 있으면 앵글을 갖다 댄다. 한번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찍으려다 멈칫했다. '나에게 과연 저 사람을 찍을 권리가 있나' 라는 의문이 솟았던 것이다. 우리는 기술 변화에만 주목하지 사람을 존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기가 오기 전에 우리 세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떻게 사람을 존중하느냐는 윤리적인 문제다" .

그는 이어 "결국은 영화를 만드는 이가 어떤 사고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고 덧붙였다.

(이시이소고는 "필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 같은 게 있지만 디지털에 그런 게 있을 지는 의문" 이라고 했고 홍감독은 "디지털 카메라는 밀도 있고 긴장감있게 사고하는 걸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고 말했다).

자기 영화처럼 소수의 관객이 보는 영화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덧붙인 말. "한 사회가 하나의 문화에 의해 관리되고 하나만 수용되는 상황은 소름끼칠 만큼 두려운 일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일반 관객의 정서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다양성이 존중받는 것, 그것은 영화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소수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그런지 울림이 더 깊다.

그는 최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브뤼셀엔 처음 가 봤다. 이번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느낀 점은 어디에 있든 '나' 는 '나' 라는 것이었다. 또 어디에 있든 영화를 창작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 영화를 위해서, 또 그것을 즐길 관객을 위해서도 그가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는 말이 무척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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