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가 불굴의 의지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윙은 노력만 하면 완벽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린 위에서 떨리는 마음과 손을 의지로 고정시키긴 어렵다.
성호준의 골프 진품명품 <21> 오빌 무디의 롱 퍼터
1969년 US오픈 챔피언 오빌 무디(1933~2008)는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주한미군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골프를 연마했다. 한국오픈에서 세 차례 우승했다. 워낙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아마추어인데도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 초청됐다. 59년과 66년엔 챔피언이 됐다. 더 잘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쇼트게임, 특히 퍼트 실력이 별로였다. 60년 KPGA 선수권에서 무디를 꺾은 한장상은 “불안한 퍼트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디는 한국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67년 전역하고 미국 PGA 투어에 진출했다. 역시 퍼트가 발목을 잡았다. 퍼팅 입스 때문에 PGA 투어에서 2류 선수로 머물렀다. 69년 당시로선 낯선 역그립을 잡고 퍼트를 하면서 US오픈 우승을 했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시니어 투어에서는 11승이나 했다. 매우 긴 마법의 방망이를 얻었기 때문이다.
긴 퍼터는 65년 처음 등장했다. 몸 축 퍼터(body pivot putter)라는 특허가 나왔다. 필 로저스라는 선수가 60년대 말 이것을 썼는데 보수적인 선수들의 눈총만 받고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무디는 80년대 중반 시니어 투어에서 긴 퍼터를 만나게 된다. 동료인 찰리 오언스가 집에서 만들어 온 50인치짜리 퍼터였다. 이것을 써 보고 무디는 빙고를 외쳤다. 이 퍼터는 빗자루(broom)처럼 길다고 해서 브룸 퍼터라고 불린다. 그립 끝을 턱이나 가슴에 고정시키고 스윙한다. 축을 만드는 것이다. 머리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안정적으로 퍼트를 할 수 있다.
배꼽에 고정하고 스트로크하는 벨리 퍼터를 대중화한 선수는 폴 에이징거다. 그 역시 의지의 인물이다. 93년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암이 발견됐다. 암세포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97년 투어에 복귀했다. 스윙도 복구했지만 퍼트는 복구가 안 됐다. 퍼트 순위가 100위를 넘었다.
에이징거는 쇼트게임의 대가 데이비드 펠즈의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음을 얻었다. 퍼트를 잘 하는 선수들은 스트로크 내내 샤프트의 끝이 배꼽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냈다. 샤프트 끝과 배꼽을 아예 붙여버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는 브룸 퍼터를 잘라 배꼽에 밀착시킨 후 퍼트를 해 봤다. 펠즈의 이론은 맞았다. 그는 퍼트를 쏙쏙 넣기 시작했다.
2000년 소니 오픈에서 에이징거는 우승했다. 그해 그의 퍼트 순위는 전년보다 107계단 올라간 4위였다. 에이징거의 부활 신화로 인해 벨리 퍼트는 비교적 저항을 받지 않고 확산됐다. 2003년 PGA 투어에서 벨리 퍼터를 쓴 선수들이 8승을 합작했다. 비제이 싱과 프레드 커플스도 그중 하나였다. 콜린 몽고메리는 마스터스에서 벨리 퍼트를 쓰면서 퍼트 랭킹이 1위로 올랐다.
일반적인 퍼터 길이는 33~35인치다. 벨리 퍼터는 40~41인치, 롱퍼터는 40~49인치이며 키에 따라서 50인치를 넘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면 손이 떨리는 경우가 있다. 베른하르트 랑거와 김종덕 등이 퍼팅 입스에 시달리다가 긴 퍼터를 쓰면서 부활했다. 전통적 퍼터는 터치감이 좋다. 거리감에서, 내리막 퍼트 등 미세한 퍼트 등에서 효과가 뛰어나다. 그러나 짧은 퍼터는 몸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어서 손목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방향성이 떨어진다. 롱퍼터가 방향성이 가장 좋다. 벨리 퍼터는 그 중간이다. 아이언과 우드의 중간인 하이브리드 클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