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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다른 인종과 결혼해 사는 희로애락…할리우드 배우 다이앤 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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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엔 국경이 없다? 민족과 인종을 넘어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것이 과거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돼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래도 결혼은 한국 사람이랑 해야지’ 하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비단 우리뿐이 아니다. 자녀들이 ‘같은 인종’과 결혼하길 원하는 기성세대의 바람은 지구촌 주류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정서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국경 너머의 키스(원제: Kissing Outside The Lines: A True Story of Love and Race and Happily Ever After)』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미국에서 ‘다른 인종’과 결혼해 살며 겪는 희로애락을 유머러스하게 펼쳐내고 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CNN·뉴욕 타임스·마리클레르 등 언론이 앞다퉈 소개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저자인 다이앤 파(Diane Farr)는 CBS의 ‘넘버스(Numb3rs), FX의 ‘레스큐 미(Rescue Me)’, 쇼타임의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 등 TV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할리우드 배우다. 그녀는 2006년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동포 정승용씨와 결혼했다. 다이앤 파를 LA에 있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글=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사진=LA중앙일보 신현식 기자

●책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저와 승용의 이야기는 물론 타인종과의 사랑과 결혼이란 면에서 동일한 경험을 한 비슷한 또래 여럿의 이야기를 함께 담은 책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관심 있어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책을 내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이나 종교 문제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부모님을 비난할까 봐 이런 문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사실 책을 쓰다가 의도와 다르게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들게 될까 걱정도 많았습니다. 한국인이나 다른 아시안에 대해 함부로 일반화하지 않기 위해 신경도 많이 썼어요. 이런 부분을 독자들이 이해해준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희 부모님과 시부모님 모두 책을 좋아해 주시고요.”

다이앤 파 가족.

●남편과의 연애 과정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창 연애 중일 때 승용이 진지하게 ‘난 한국 여자와 결혼해야 돼’ 라는 말을 했어요. 전 그 말이 다른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리로 알아 듣고 ‘세상에 이런 나쁜 사람이 다 있나’ 생각했었죠. 알고 보니 그 말이 아니었지만요. (웃음) 그는 부모님께서 ‘결혼만은 꼭 한국 여자와 해야 한다’고 평생을 강조해 오셨다고 설명했어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메리칸’인데도 말이죠. 처음엔 좀 당황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어요. ‘흑인이나 푸에르토리코 사람을 데려오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항상 엄포를 놓으셨었거든요. 다행히 저는 이 문제를 놓고 20여 년간 부모님과 싸웠고 당시 나이도 서른 다섯이나 되다 보니 조금은 쉽게 승낙을 얻을 수 있었죠.”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친척들부터 하나씩 인사를 드리며 저희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어요. 저는 타인종과 결혼한 다른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조언을 얻었고요.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쉽게 승용의 부모님이 저를 사랑으로 받아주셨어요. 언어 장벽 때문이긴 했지만 처음 집안 어른들이 저에게 말 한마디 안 걸어주실 때는 좌절도 컸지만요. 그동안 백인인 제가 누렸던 모든 사회적 혜택을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만일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해 혼혈인 아이들을 낳았을 때 혹시라도 내 자녀들이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미국 땅에서 내가 겪지 못했던 차별이나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죠. 결혼식에도 승용의 친척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죠.”

●완전히 한 가족이 됐다고 느낀 것은 언제입니까.

 “첫 아기를 낳았을 때예요. 허니문 베이비로 아들을 낳았거든요. 첫 아이가 아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어요. 한국 어르신들이 아들을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고 있었거든요. 큰아이가 9개월 됐을 때 또 쌍둥이를 임신해 두 딸을 낳았어요. 시부모님께서 ‘아이들이 우리 승용이를 꼭 닮았다’며 좋아하실 때 그분들의 큰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잘 전달되지 않을 때도 있고, 함께 둘러앉은 식탁에서 서로 할 말이 없어 서먹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제가 이 가족의 한 부분이란 사실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한 것으로 압니다.

 “중요한 인사말이나 어른들을 부르는 호칭,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 두 손으로 물건을 주고 받는 법 등을 미리 배웠어요. 결혼식을 전통 한국 혼례로 치렀는데, 와서 보신 분들이 ‘다이앤이 승용보다 오히려 더 한국 사람 같다’며 웃으실 정도였어요.”

●문화적 차이를 경험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많던데요.

 “친척들을 부르는 호칭들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었어요. 고모, 큰엄마, 오빠, 사촌동생 등등…. 그런데 재미난 점은 서로 호칭으로 부르기만 할 뿐 그 친척들의 이름은 모르고 있더라는 거예요. 기껏해야 자녀들의 이름을 붙여 ‘누구누구 엄마’로 부른다는 점이 정말 신기했어요. 또 시댁 어른들이 다들 저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신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다 큰 어른인 저에게 ‘너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시니 한때는 적응하기가 힘들었죠.”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인종과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문제는 이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마지막 편견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과 결혼만큼은 같은 피부색,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과 하길 원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들을 혐오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저 고유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질까 봐, 며느리나 사위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도 생기는 것이겠죠. 마치 저희 부모님이 그 옛날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흑인들과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들과 섞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요.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거듭돼 가면서 올바른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 이런 고정 관념도 조금씩 사라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더욱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인생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말씨름으로 부모님을 설득하기 힘들 겁니다. 서로 ‘뭘 모른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기 일쑤니까요. 내가 살고 싶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선택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여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 많이 다른 사람이 아니란 것을, 그분들께서 두려워했던 일들은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온 것뿐이라는 사실을요. 꼭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기 때문에 반대도 하시고 고집도 부리시는 것이란 점입니다. 부모님들께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들 딸이 누구를 사랑하건, 누구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데려오건, 그들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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