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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200여 년 7대째 버번 빚는 ‘짐 빔’의 주인, 프레드릭 부커 노 3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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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색을 보세요. 그리고 코 밑으로 가져가 향을 맡아 보세요. 이때는 입을 좀 벌려야 합니다. 알코올이 너무 세니까요. 그리고 입안에 넣고 빙글빙글 돌려보세요. 그리고 혀 끝으로 ‘쩝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어보세요. 그리고 이제 목 뒤로 넘깁니다. 자~ 어때요? 따뜻한 기운이 쫙 퍼지죠? 이게 버번을 마시는 방법입니다.”

 담배 연기 뿌연 바에 걸터앉아 갈색 빛 버번을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트렌치 코트 차림의 우수에 젖은 남성은 아니었다. 고도 비만 몸매에 흰 수염, ‘짐 빔(Jim Beam)’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글라스를 바꿔가며 대낮부터 알코올 농도 60%까지 올라가는 버번을 건네며 ‘올바른’ 음주 교육을 하는 옆집 아저씨 같은 이 남자. 프레드릭 부커 노 3세(54)다. 그는 매년 600만 상자의 버번을 생산하는 ‘짐 빔’의 오너이자 마스터 디스틸러(증류책임자·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사람)다.

조진화 프리랜서

짐 빔과 짐 빔 블랙라벨, 놉 크릭(Knob Creek), 부커(Booker’s) 등 다양한 버번을 생산하고 있는 ‘짐 빔’은 최근 생산라인에 데블스 컷(Devil’s Cut)을 추가했다. 짐 빔 술병 뒤에 그려진 얼굴이 바로 이 사람, 프레드릭이다. 버번 생산·판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켄터키주 짐 빔 공장에서 ‘시대의 술꾼’과 알딸딸한 인터뷰를 가졌다.

●버번이란 대체 뭔가.

 “버번으로 불리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미국 내에서 생산돼야 하고, 둘째 옥수수가 51% 이상 첨가돼야 한다. 셋째 내부를 훈제한 새 참나무통에서 숙성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짐 빔 버번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를 좀 알아야 한다. 짐 빔 버번은 1795년 처음 등장했다. 그 후 아들의 아들, 또 아들이 가문의 술을 빚어왔다. 프레드릭 부커 노 3세는 현재 이 집안의 7대손으로, 현대 짐 빔 버번의 사업적 기반을 세운 ‘짐 빔’의 외증손자다. 짐 빔의 아들인 제레마야가 손이 없어, 노씨 가문과 결혼한 딸 밀드레드의 아들인 부커 노 2세가 가업을 이었기 때문이다. 노 2세가 2004년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부고란에 “버번 비즈니스를 되살린 주인공”이라고 평가했다. 프레드릭 부커 노 3세는 그의 아들이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압박은 없었나.

 “아버지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내 사촌들만 열여덟 명이다. 나처럼 똑같이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에 꼭 내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에 부담은 없었다.”

●정작 가업을 잇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반응은.

 “나보다 먼저 양조장 일을 시작한 사촌이 있었다. 하지만 두 명이나 중간에 그만둬버렸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더 혹독하게 훈련시키셨다. 처음 내가 맡은 일이 오후 4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하는 야간 근무였다. 일종의 테스트였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월급도 다른 사람들보다 적었다. 짐 빔의 이름을 잇는 것이 그렇게 화려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려 했던 것 같다.”

●200년이 넘는 전통에 대한 부담은.

 “가족들이 모두 한 사업에 ‘올인’하는 환경에서 자라서 솔직히 이 사업을 당연시 여긴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가 스몰 배치(small batch: 소량생산) 버번을 만드실 때 옆에서 도왔는데, 그때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얼마나 컸는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아버지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서야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가는 일이 얼마나 크고 부담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됐다.”

●스트레스도 상당할 텐데.

 “아버지가 내게 남긴 조언은 ‘너 자신이 돼라(Be Yourself)’였다. 남의 영향을 받지 말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말하라고 당부하셨다. 정직하게 짐 빔의 철학을 얘기하면 ‘어디서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솔직히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버번 하나 더 팔겠다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그게 꼭 100% 사실이란 법은 없다. 다른 버번에 대해 험담하지 않고, 내가 만드는 버번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아버지께 배웠다.”

●젊은 시절 짐 빔 가문이어서 인기 좀 있었겠다.

 “물론이다. 이 파티, 저 파티 초대받아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래서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했지만. 아버지가 싫어하셨지….(웃음)”

 프레드릭이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외증조부 짐 빔 때문이다. 현재 짐 빔의 기초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그는 1900년대 초 ‘금주령’이라는 큰 좌절을 겪었다. 1919~33년 미국 정부의 금주령으로 미국 내 모든 알코올 제조와 판매가 금지됐다. 짐 빔은 그렇게 잘나가던 사업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뺏긴 것이다.”

●금주령 시절 애기는 누구에게 들었나.

 “밀드레드 이모 할머니(짐 빔의 딸 중 하나)가 해줬다. 하루아침에 법을 통과시켜 날벼락을 맞은 증조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주에 내려가 오렌지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실패했고 다시 켄터키주로 옮겨 탄광 사업을 하셨지만 그것 또한 망했다. 그 후에는 채석 사업에 손을 대셨고, 채석장 근처의 양조장 하나를 구입하셨는데 1933년 금주령이 풀리자 그 곳을 고쳐 짐 빔 버번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증조할아버지 나이가 70세였다.”

 짐 빔은 당시 10대 청소년인 아들 제레마야와 함께 120일 만에 양조장을 고쳐 짐 빔 가업을 다시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 짐 빔에 대한 기억은.

 “증조할아버지는 1947년 돌아가시고, 난 1957년 태어나서 만나지 못했지만 상당히 격식을 차리는 분이라고 들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보트를 타고 낚시를 하는 사진을 봤는데, 스리피스 양복을 차려입으셨더라. 난 지금까지 양복 입고 낚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정도로 격식을 중시하시는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에 비하면 캐주얼한 편이셨다.”

●본인보다 더 편한 스타일이었나.

 “하하 내가 좀 더 심하게 캐주얼한 편이긴 하다. 아버지가 오늘 인터뷰를 하셨다면, 적어도 양복에 넥타이는 매셨겠지. 난 보이는 것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다. 처음에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정장을 차려입고 다녔는데, 내가 가는 곳은 술과 관련된 곳 아닌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마피아 아니냐’며 불편해하더라. 하하. 그 후로는 나도 그 사람들처럼 편하게 입고 다닌다.”

 1800년대 버번은 남아도는 옥수수를 편리하게 저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 옥수수와 다른 곡물을 섞어 발효시켜 위스키를 만들면 썩을 염려도 없고 운반도 쉬웠다. 이곳저곳에서 버번을 빚는 집이 늘었고, 소수는 사업으로 확장해 갔다. 그러나 당시는 매매보다는 물물교환 수준이었다.

 그는 몇 해 전, 1795년 첫 버번이 만들어졌던 양조장을 찾아냈다. 현재 짐 빔 공장에서 40㎞ 떨어진 곳으로 시냇가 옆에 낡은 건물이 버려진 채 있었는데, 버번 셀러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정부 땅문서 기록을 보고 찾아냈는데, 다시 찾아가보니 차도도 없어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1795년부터 지금까지 짐 빔이 성장한 것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다”고 밝혔다.

 어느덧 버번을 홀짝거린 지 1시간이 흘렀다.

●버번을 가장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아버지는 물을 조금 섞고, 얼음 하나를 넣어 마셨다. 나는 물과 얼음을 좀 더 섞어 먹는다. 물론 버번이 섞인 칵테일도 마신다. 요즘 바텐더들은 아주 신선한 재료로 아주 맛있는 버번 칵테일들을 만든다. 요즘 버번이 다시 뜨는 이유도 사실 칵테일 때문이다. 무엇을 섞든지 밸런스만 찾을 수 있다면 버번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멋져 보이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쯧쯧. 버번의 비밀 레시피는 내 것이지만, 만들어진 후에는 모두 소비자의 것이다. 스테이크에 소스, 후추 등을 뿌려 먹는 손님에게 ‘내 스테이크의 진정한 맛을 망치지 말라’고 하면 되겠나. 콜라를 섞어 마시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예전에 한 시음행사에서 한 여성이 아버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 대답이 이랬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버번에 콜라를 섞었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콜라-버번 칵테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이쯤에서 한국식 폭탄주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다. 프레드릭은 감탄사를 연거푸 쏟아냈다.

●한국에서는 맥주에 소주나 위스키, 보드카 등을 섞어 마신다.

 “와우. 와일드하다. 15년 전쯤에 버번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소주만 주고 폭탄주는 안 주던데. 하하.”

●요즘 개발하고 있는 새로운 버번이 있나.

 “여러 곡물을 섞어가면서 알코올과 놀고 있다. 좀 있으면 배럴에 넣어 숙성단계에 들어간다. 내 직업은 요리사와 똑같다. 닭고기로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어떤 때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어떤 때는 어마어마한 음식으로 탄생하는 식이다.”

●비밀 레시피는 몇 명이나 알고 있나.

 “별로 없다.”(비밀 레시피에 들어가는 이스트는 금주령 이후부터 만들어진 버번에 들어갔던 이스트를 지금까지 배양해 쓴다.)

●주량이 셀 것 같다.

 “많이 마시는 건 아닌데…. 하지만 내가 쓰는 ‘많지 않다’의 정의가 네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하. 사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버번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아침처럼 쌀쌀한 날, 버번 한 잔이면….”

●아침부터 버번을 마시나.

 “아니, 뭐. 지금은 따뜻해졌지만…. 아침에는 추웠잖나.”

 최근 켄터키주의 한 지방신문에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설이 실렸다.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버번을 많이 안 마시기 때문에, 이 협정으로 켄터키주가 이득을 볼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꺼냈다.

●버번 때문에 한·미 FTA를 반대하는 소리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버번은 숨어 있는 비밀과도 같다. 버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마셔본 사람이 권하는 입소문이야말로 버번의 불꽃을 다시 피워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버번의 역사를 알고, 숙성 시간을 이해한다면, 정말 버번의 맛을 알게 된다.”

●다른 버번 회사들과의 경쟁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와일드터키(Wild Turkey)’의 지미 러셀은 우리 아버지와 정말 친한 친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보다 지미와 함께 더 많이 울었다. 아직도 지미를 만나면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헤븐 힐(Heaven Hill)’의 파커 빌은 내 사촌이고, 또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의 빌 새뮤얼의 아버지는 우리 할머니와 댄싱 파티에 다닌 남자친구였다. 다들 버번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버번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고 가족이고 친구들이다. 사실, 경쟁은 이 버번을 파는 마케팅 부문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심하다.”

●짐 빔의 역사를 이어나갈 8대손에 대한 계획은.

 “아들이 하면 좋겠다. 지금 대학생인데 강요는 안 한다. 아버지가 내게 하신 것처럼 다른 옵션도 가질 수 있다는 분위기로 나가고 있다. 세계를 돌면서 버번을 알리는 일처럼 흥미로운 일은 없지만, 아들이 꼭 그 일을 좋아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아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 일은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지만 좋은 날이 나쁜 날보다는 많아야 하지 않나.”

j 칵테일 >> 21세부터 가능한 버번 공장 견학

말과 바비큐밖에 보고 먹을 것이 없다고 알려진 켄터키주는 최근 켄터키 버번을 이용한 관광 아이디어를 만들어 성공했다. 이른바 켄터키 버번 트레일(Kentucky Bourbon Trail). 켄터키주에서 생산되는 6개의 버번 공장을 방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고 장려한다. 지난 5년간 150만 명이 켄터키주 버번 공장들을 견학했다. 짐 빔 공장에는 연간 6만 명이 찾고 있다. 짐 빔, 헤븐 힐, 메이커스 마크, 포 로즈, 와일드 터키, 우드 포드 등 6개 업체를 모두 방문해 도장을 다 받으면, 정부에서 기념 티셔츠도 보내준다. 업체들은 브랜드에 얽힌 역사와 스토리, 제조 과정, 배럴 셀러 등을 보여주고, 견학이 끝나면 무료 버번 시음회도 연다. 마무리는 버번이 들어간 초콜릿 시식. 물론 견학 최저 연령은 음주가 가능한 21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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