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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개의 고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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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남아공 더반 교외에 ‘사우전드 힐스’ 즉 ‘1000개의 고원’이란 곳이 있다. 정말 1000개인지 일일이 세어보진 못했지만 수많은 언덕이 거대한 고원을 형성하며 한 차원 다른 장관을 이뤘다는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번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의 극적인 성공은 바로 그 1000개의 고원을 연상시킨다. 크고 작은 언덕들이 높고 낮음을 구태여 따지지 않고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며 눈부신 풍광의 고원을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한 그 모습은 강원도민과 온 국민이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두 번의 좌절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온 열정을 다 바쳐 이뤄낸 평창 유치의 쾌거와 정말이지 닮았기 때문이다.

 # 1000개의 고원은 줄루족의 삶터였다. 척박한 삶이지만 줄루족은 항상 꿈을 노래했다. 누군가 어느 언덕에서 꿈을 노래하면 그것이 메아리를 이어가 1000개의 고원 전체가 같은 꿈을 노래했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의 쾌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김진선 전 강원지사는 아직 도지사도 아니던 시절에 설악산 신흥사의 한 선방에서 당시로선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이 뻔했던 겨울올림픽 유치를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도지사가 되고 나서 1999년 2월 겨울 아시안게임을 성공리에 마친 후 겨울올림픽 유치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강원도의 노래가 됐다. 그는 두 번의 쓰라린 실패를 맛봤지만 굴하지 않았다. 세 번째 도전해서 기어이 해냈다. 적잖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은 그의 존재를 통해 대한민국 평창의 겨울올림픽 유치 노력이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노래했던 ‘평창의 꿈’은 강원도의 노래, 대한민국의 노래를 넘어 세계인의 노래가 됐다.

 # 1000개의 고원에 살던 줄루족은 전형적인 투사였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수주전에 강한 투사다. 목표가 정해지면 돌진한다. 그리고 기어이 해낸다. 놀라운 돌파력이고 쟁취력이다. 2018 겨울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IOC 제123차 총회가 열린 남아공 더반에서 머문 닷새 남짓한 시간 동안 이 대통령은 특유의 친화력과 돌파력으로 IOC위원들을 개별 면담해 설득하고 개막식과 각종 리셉션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접촉하며 이번 평창 유치 쾌거에 결정골을 넣은 골게터였다. 특히 투표에 앞서 실시된 프레젠테이션에서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평창 겨울올림픽에 대한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을 제가 보증합니다”라고 역설해 IOC위원들의 표심이 평창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았다. 정말이지 이런 대통령의 친화력과 돌파력이 왜 유독 국내에서는 제대로 먹히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 1000개의 고원에는 줄루족의 현자도 산다. 그 현자는 신의 메시지를 받는다. 자크 로게 위원장은 ‘평창 63표, 뮌헨 25표, 안시 7표’라는 경이로운 스코어 밑에 세 명의 IOC위원들이 각기 다른 색깔의 펜으로 이를 확인하고 사인한 문서 한 장을 이건희 회장에게 건넸다. 옆에 있던 홍라희 여사가 이것을 다시 받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홍 여사의 손은 신의 메시지를 받은 듯 떨리고 있었고 눈가엔 잔잔하게 이슬마저 맺혔다. 나는 지니고 있던 카메라에 그 문서를 사진으로 담았다. 신의 메시지와도 같은 스코어가 담긴 원본문서는 비록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담긴 땀과 눈물과 인내의 두께와 깊이는 측량할 길이 없었다.

 # 1000개의 고원에 석양이 깃든다. 그 석양의 붉은 그림자가 언덕과 언덕을 잇고 서로 맞닿게 해 마치 1000개의 고원이 어깨동무한 듯 보인다. 이제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라는 쾌거를 이룬 우리 역시 더 큰 어깨동무로 하나 돼 ‘평창의 꿈’을 강원도와 대한민국의 꿈을 넘어 세계의 꿈으로 평창과 정선과 강릉에 산재한 겨울올림픽 경기장은 물론 우리들의 삶터 곳곳에서 키우고 펼쳐 나가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