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정국 감독의 새영화 '산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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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국(42)감독이 연출한 '산책' 을 보면 '이 감독 참 용감하다' 는 생각이 든다. 폭력과 섹스를 앞세워 갈수록 자극적이고 충격적으로 흐르는 영화계 풍토와는 정반대로 잔잔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998년에 2백만 명을 동원했던 이 감독의 전작 '편지' 처럼 노골적으로 눈물샘을 찌르지도 않는다. 아주 작은 일상에 행복이 숨어 있다고, 사랑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당신 곁에 있다고 나직이 속삭인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30대 중반.20대의 풋풋한 꿈들이 하나 둘 꺾인 모습들이다. 딸의 양육문제를 놓고 전부인과 갈등을 빚는 이혼남이 나오는가 하면,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져 고민하는 노총각,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만족하는 인물이 있다.

길 모퉁이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언제나 모차르트 음악만 트는 영훈(김상중). 386세대인 그에겐 노래를 매개로 10년 우정을 다져오는 동아리 '노래이야기' 가 있다.

열번째 콘서트를 준비하는 영훈에게 술집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려는 연화(박진희)라는 여인이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들어온다. 마음 속 깊이 젊은 시절의 우정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영훈의 순수함에 이끌리면서 연화도 자신의 허물을 하나 하나 벗겨나간다. 이 부분에서 영훈의 아버지(박근형)가 등장한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언제부턴가 말을 잃어버린 그는 연화 주변을 맴돈다.

그러는 영훈 아버지의 품에는 앨범이 한 권 숨겨져 있다. 배낭을 짊어지고 전국을 돌며 아름다운 길만을 골라 찍은 사진이다.
못마땅해 하는 영훈에게 아버지가 들려주는 사연은 이렇다. "니 어미 죽을 때 말이야, 당신 손 잡고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됐다고 눈물짓더구나. 그 후로 내가 걸었던 길을 사진으로나마 무덤에 누운 니 어미에게 보여줬던 거야. "

각박한 현대생활에 쫓기다 보면 누구나 가정생활에 소홀하기 쉽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렇게 산다. 이 영화는 빌딩 숲 사이에 새둥지처럼 자리잡은 소공원 같다. 그 벤치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활력을 새롭게 하면 어떨까.

이 영화는 또 특별히 작곡된 영화 음악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산책' '그대와 영원히' 등 15곡 모두 음악적 완성도가 높고 멜로디도 제목 '산책' 에 어울리게 편안하고 아늑하다. 3월 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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