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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장이 뭐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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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

중앙일보 미 로스앤젤레스(LA) 지사가 재작년 이맘때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회장 대회에 참석한 65개국 36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해외에서 모국을 지켜볼 때 창피한 것은?’이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대답(41%)이 ‘국회 난장판’이었다. 의원들이 해머로 문을 부수고 전기톱을 들이대고 분말소화기를 뿜어대는 모습이 해외에도 크게 보도돼 망신스러웠다는 것이다. 한 한인회장은 “동포들이 외국에서 땀 흘려 이뤄놓은 좋은 이미지를 정치인들이 순식간에 망쳐놓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외 교민사회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시카고에서 열린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 선거 얘기다. 투·개표 결과 516표를 얻은 김재권(64)씨가 유진철(57)씨를 105표 차로 물리치고 당선했다. 유권자 중 139명은 현장투표, 804명은 우편(부재자) 투표를 했다. 김재권씨는 현장투표에서 지고 우편투표에서 압승했다. 낙선한 유진철씨 측은 “우편투표의 발송지와 유권자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낙선자 측의 신고를 받고 미국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파문은 계속됐다. 유진철씨가 이달 11일 LA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재권씨가 패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나에게 15만 달러의 수표를 건넸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김재권 당선자도 미국 내 한인회장들에게 해명성 e-메일을 보냈다. 지인으로부터 입수한 김씨의 e-메일을 읽어보니 15만 달러를 건넨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선거 때문에 돈을 많이 썼으며 빚진 것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서 위로금이라도 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패자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5만 달러를 준비했는데, 상대방이 ‘이미 변호사비 15만 달러를 지급했다’고 말해 ‘어차피 저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므로 불필요한 지출을 막겠다는 생각에서 5만 달러짜리 체크(수표) 외에 다시 10만 달러짜리 체크를 발행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총연합회가 더 시끄러워져서는 안 된다는 충정에서 그랬다’며 ‘다시는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사과했다.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 선거는 회비(200달러)를 납부한 회원이 투표권을 행사한다. 남의 회비를 대납하거나 교통비·숙소·향응을 제공하는 사람은 피선거권을 박탈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연합회 사정에 밝은 지인은 “양쪽 다 규정을 위반했을 것”이라며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에 관심이 가는 것은 내년 4월 11일 총선, 12월 19일 대선에서 최초로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해외 한인 유권자는 줄잡아 230만 명. 1997년 대선이 39만 표, 2002년 대선은 57만 표 차로 당락이 갈렸으니 엄청난 파워다. 국내 정치인들이 해외에 갈 때마다 현지 한인회에 전례 없이 공들이는 모습은 이미 일상화됐다. 지난해 10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 출판기념회 행사장도 정치인들로 붐볐다. 국회는 ‘세금을 내지 않는데도 투표권을 주느냐’는 일부 반론에도 불구하고 재작년 2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재외국민 투표의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해외 교포사회도 거기에 걸맞은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민사회 분열, 선거부정 등 우려하는 시선들을 깨끗이 씻어낼 필요가 있다. 이번 총연합회장 선거를 보면 걱정이 더하면 더했지 줄지는 않게 생겼다. LA 한인회장의 경우 지난해 선거 후 한인회가 하나 더 생겨 기형적인 ‘두 한인회장’ 체제가 지속되다 최근에야 합쳐졌다. 선거 송사가 잦은 탓에 ‘한인회장은 미국 법원이 임명한다’는 농담까지 생겨났다.

 해외 한인회장은 이역만리에서 자수성가한 분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소중한 지구촌 네트워크다. 해머·전기톱이 난무하는 국내 ‘난장판 정치’에 제발 해외 교포사회까지 전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