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스트리아 음악계 나치 망령 되살아나나

중앙일보

입력

극우 자유당이 참여하는 오스트리아 연립정부가 출범하자 유대계를 비롯한 세계 유명 음악인들이 잇달아 오스트리아 국적 포기를 선언하면서 외국으로 향하고 있다.1930년대 나치의 등장으로 많은 음악가들이 독일.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엑소더스'를 연상케 한다.

인도 태생의 유대계 지휘자 주빈 메타(63.이스라엘필하모닉 종신지휘자)는 "위대한 작곡가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역사가 되풀이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태생의 유대계 피아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국적을 갖고 있는 안드라스 슈프는 지난 9일 주미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열기로 했던 음악회를 취소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정치와 예술은 분리할 수 없다" 며 "자유당 인기가 치솟는 것은 부끄럽고도 용서할 수 없는 일" 이라고 밝혔다. 벨기에 출신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 총감독을 맡고 있는 제라르 모이티에는 사무국측에 사임의사를 통보하면서 "이런 나라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말했다.

이 처럼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오스트리아에 등을 돌리는 데는 하이더 자유당 당수의 예술관도 한 몫을 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술가는 게으름뱅이며 쓸모없는 식객이다" "예술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보조금을 줄이겠다"고 말해왔다.

세계음악계가 오스트리아 정부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음악나치의 망령이 되살아나 다시 한번 음악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나치의 등장으로 음악가들이 개스실에서 죽거나 망명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20세기 음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을 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베토벤.바그너.브루크너의 음악을'독일정신의 숭고한 표현'이라 하여 무척 아꼈다. 32년부터 8년간 독일 전역에서 가장 자주 상연됐던 오페라는 바그너였다.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 매년 참석하면서 지원금을 주었다.

유대인 음악가들이 흉내만 낼 뿐 창조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던 바그너는 이스라엘에서 50년이 넘도록 사실상 '금지곡'으로 남아 있다. 나치의 행진곡으로 사용돼 수용소에서 매일 틀어준 바그너의 음악은 대학살의 생존자들에게 몸서리쳐지는 악몽을 되살려 주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철거됐고 그가 쓴 연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도 카를 오르프의 신작으로 교체됐다.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힌데미트의 음악을 옹호하다 잠시 일자리를 발탁당하기도 했다.

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유대계 지휘자들이 연주 취소 또는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해 4월 히틀러는 토스카니니.쿠세비츠키.프리츠 라이너 등 미국 음악가들이 서명한 인종차별 정책 항의 서한을 받았다. 나치는 이들이 녹음한 모든 음반을 방송금지하는 것으로 '답장'을 썼다.

토스카니니는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지휘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8월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브로니슬라브 후버만,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은 베를린필의 협연 초청을 거절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시카고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자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 유대계 음악인들이 결사 반대를 선언했다. 유대계 음악가 중 독일 음악가를 옹호한 이는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뿐이었다.

유대인 작곡가들은 망명하거나 총살당했으며 이들 작품의 연주도 금지됐다. 그 여파로 이들 음악은 지금까지도 널리 연주되지 않는다. 망명 작곡가들은 브로드웨이.할리우드로 진출해 영화음악가.뮤지컬 작곡가가 되거나 가난과 싸우면서 신대륙에서 외롭게 여생을 보냈다.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에 대한 나치의 혐오증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2차대전 후 미국과 유럽서 모더니즘이 득세했다는 해석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