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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뽀뽀뽀’ 30년 함께한 음악감독 이민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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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뽀뽀뽀’가 서른 살을 맞았다. 그동안 왕영은·고(故) 길은정·장서희처럼 대물급 연예인 23명이 진행자 ‘뽀미 언니’로 활약했다. 동요를 합창한 아이도 수천 명에 이른다. 거쳐 간 PD는 100명을 넘는다. 1981년 5월 25일 첫 전파를 탄 뒤 낳은 기록들이다. 한국 방송사에서 이보다 앞선 프로는 6개월 먼저 출발한 ‘전국노래자랑’ 정도다. 하지만 뽀뽀뽀 뒤엔 또 다른 진기록이 있다. ‘왕고참’ 이민숙(52) 음악감독이다. 1회부터 7400여 회가 넘는 지금까지 지휘봉을 잡았다. 그가 j에 뽀뽀뽀 ‘30년 비화(秘話)’를 털어놨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30년까지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중간에 프로가 없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그걸 딛고 국내 최장수 어린이 프로그램이 됐다. 마치 딸이 시집을 너무 잘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혹은 아들이 성공한 기분? 감개무량하다. 스물둘에 합류했으니 나한텐 뽀뽀뽀가 인생 그 자체였다. 노래를 부르던 숱한 어린이가 연예계·문화예술계로 진출하는 걸 보면 그만큼 뿌듯한 게 없었다.”

●긴 세월인데 혹시 개근상도 탔나. 녹화 펑크 낸 적은?

 “한번은 아파서 쓰러졌다. 왕영은씨가 MC 하던 초반 시절이었다. 송창의 PD라고 지금 tvN 사장인데, 제가 없으니 병원으로 회의를 하러 왔다. 성우와 연출진도 따라왔다. 뽀미 언니가 왔다며 병원이 난리가 났다. 또 언젠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팔이 부러졌다. 녹화에 못 들어갔다.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데 녹화 테이프 보내더라. 언제, 어떤 상황이 됐건 뽀뽀뽀에 푹 파묻혔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즐거운 기억이다.”

●꽤 많은 동요를 직접 작곡했다는데.

 “만든 노래가 2000곡 가까이 된다. 유치원에서도 많이 불리는 걸로 안다. 원래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아는 교수님을 통해 뽀뽀뽀 섭외가 들어왔다. 처음엔 평생 직장이 될 것이라 생각도 못했다. 원래 주위에서 ‘음감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모친이 음악가 현제명 선생님 제자였고 역시 피아노를 쳤다. 83년에 ‘똑순이 동요’를 기획해 전곡을 만들었다. 동요 선풍이 일었다. 제작자는 건물을 샀다고 하더라, 하하.”

●자질 있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닌데.

 “어머니 가르침이 있었다. ‘어른들이 집에 가기 전에, 먼저 자리를 뜨지 말라’고.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처음엔 악보 찾기부터 복사까지 도맡았다. 나름대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악착같이 일할 수밖에. 맨땅에 헤딩이었다. 이 바닥에서 씹히지만 않으면, 잘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정신으로 버텼다. 지금은 어떤 일도 힘들지 않게 맞닥뜨릴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뽀미 언니들과의 인연도 깊었나.

 “물론이다. 길은정씨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와 얘기를 많이 했던 편이다. 그래서 기억이 더 많이 난다. 뽀미 언니 중엔 유명 연예인도 많았다. 현재 라디오 진행하는 배우 최유라씨도 그렇고, 조여정씨와 이의정씨도 거쳐 갔다. 김청씨도 아주 잠깐이지만 나왔다. 신현숙 아나운서는 뽀뽀뽀를 진행하다 손석희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뽀뽀뽀 출연 제자 중에 훗날 스타도 많이 배출됐다.

 “그룹 빅뱅의 G-드래곤과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연배우 류덕환 등이 거쳐 갔다.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애들은 특출한 자질이 있다. 어려서부터 그게 보인다. G-드래곤은 끼가 넘치고 총명했다. 쟤는 ‘뭔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류덕환도 진중하고 노력하고 그런 성격이었다.”

●엄마들이 자식 연예인 시키려고 많이 찾아올 듯하다.

 “그런 부모도 많다. 그럴 때마다 강조하는 게 있다. ‘애는 엄마가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 자식이니 좋은 쪽으로만 오판할 수 있다. 제발 좀. 전문가에게 자질을 물어보라. 애는 별로 자질이 없는데 ‘미스코리아 시키겠다’고 하는 부모도 있다.”

●어떻게 조언해주나.

 “예전엔 가수 오디션 가면 ‘노래 잘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너 웃기느냐’고 묻는다. 연예인 되려면 다방면의 공부와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어린이 합창단 애들한테 말한다.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서고 싶다면 성적표 갖고 오라’고.”

●출연 아이들에게 뽀뽀뽀는 어떤 존재인가.

 “뽀뽀뽀에 발 들여 놨다고 애를 가수 ‘비’처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프로도 그저 아이들 성장과정의 하나쯤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말하자면 ‘사회’를 배우는 거다. ‘선의의 경쟁’도 그중 하나다. 무대 앞에 서는 기회를 잡으려면 ‘나도 잘해야겠다,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이런 걸 배울 수밖에 없다. 물론 떨어져도 그만큼 배울 게 있다.”

●30년간 애들과 호흡하면서 나름의 ‘교육관’도 생긴 것 같은데.

 “애들과 워낙 오래 있다 보니 느끼는 게 있다. 그런데 정작 엄마들은 잘 모른다. 요즘 애들은 발음이 부정확하다. 말을 할 때도 끝을 흐린다. 상대방 눈도 쳐다보지 않고. 나는 부모들에게 ‘말할 유인을 제공하라’고 이른다. 예컨대 ‘밥 먹자’ 이러면 애들도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대신 ‘뭐 먹을래’ 선택권을 주는 거다. 그럼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뽀뽀뽀 출연 아이들하고 얘기할 때 늘 손을 잡는다. 말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즘 애들은 랩 같은 노래도 자주 부른다. 그런데 말을 못하나.

 “어려서부터 너무 빠른 리듬, 어려운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면 좋지 않다. 어린애들이 랩이며 대중가요 잘 흉내 낸다고 부모가 좋아하는 걸 보면 속 터진다. 발음부터 부정확한데.”

●노래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하나.

 “물론 동요라고 틀을 갖고 짜맞춰서 부를 필요는 없다. 요즘은 동요에 따라붙는 비주얼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엔 손으로 까딱까딱 조작하는 인형을 쓰고 그랬잖나. 이젠 애니메이션을 거쳐 3D(3차원) 영상을 배경으로 활용한다. 그만큼 아이들 눈이 고급화돼 있으니. 한번은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에게 장윤정씨의 ‘어머나’를 불러 주면서 ‘다 줄게요~’ 가사를 가르치더라. 내가 물었다. “뭘 다 준다는 거냐”고. 답을 못하더라. 적어도 그런 걸 고민해서 애들에게 노래와 음악을 가르쳐야 한다.”

●아까 뽀뽀뽀가 사라질 뻔했다고 말했는데.

 “93년에 시청률 때문에 편성에서 폐지될 뻔했다. 그러자 시민단체와 학부모·꼬맹이들이 ‘뽀뽀뽀를 살려 달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찾아왔다. 이런 성원이 프로를 살려냈다.”

●그렇다면 뽀뽀뽀의 프로그램 경쟁력은 무엇인가.

 “유아들 프로그램의 혁신을 일궜다. 음악·체육·도덕·미술 등 모든 게 녹아 있다. 아이들 인지·인성 교육에 도움이 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었다.”

●좋은 아동 프로란 어떤 것인가.

 “애들이 보고 ‘엄마, 나도 저기 출연하고 싶어’ 이런 게 가장 좋은 프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희한한 게 녹화 끝나고 집에 안 간다. 마력 같은 게 있는 거다. 요즘 성인 대상의 오디션 프로가 많아졌다. 어른들에게도 방송 출연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런 추세로 가는 거다. 100명 안팎 연예인이 채널만 바꿔 나오니 지겹기도 하니 이런 프로가 먹힌다. 하지만 애들에게 가수 하라고 부추길까 봐 솔직히 걱정은 된다.”

이민숙 감독이 겪은 국민 스타들

이민숙 감독은 뽀뽀뽀가 잘나가던 80, 90년대를 언급했다. 그는 “10대 가수들까지 뽀뽀뽀에 출연해 동요를 새로 배우고 녹음하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곤 뽀뽀뽀 음악을 포함해 방송사 어린이 합창단을 책임졌을 때 겪은 ‘스타 에피소드’를 한아름 공개했다.

김혜자

한번은 배우 김혜자씨에게 출연 제의를 했다. 김혜자씨가 말했다. “나 혼자 어떻게 나가.” 이 감독이 되물었다. “그럼 누구랑 나오실래요.” 김혜자씨의 대답. “그럼, 손녀랑 나갈까?” 그렇게 할머니 배우와 손녀의 동반 출연이 이뤄졌다. 녹화장에서 한글 ‘ㄷ’자를 주제로 노래를 녹음했다. 몇 번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 감독이 물었다. “비결이 뭐예요?” 김혜자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나, 이 노래 100번 연습했어.” 대가(大家)란 그런 것이었다.

조용필

녹음실에서 이 감독은 골몰했다. ‘어떻게 하면 조용필을 출연시킬까.’ 그만 나오면 다른 가수들 섭외는 일사천리로 이뤄질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조용필은 이 감독에게 무척 어려운 존재였다. 복도에서 우연히 지나쳐도 꾸벅 인사만 건넬 뿐, 말도 못 붙였다. 그러나 어렵게 만나 출연을 요청했다. 조용필씨가 수첩에 내용을 적었다. 이 감독이 물었다. ”그거 왜 적으세요?” 조용필씨가 응수했다. “나, 나오라며?” 다시 이 감독의 물음. “안 나온다면서요?” 이어지는 조용필의 한마디. “안 나가는데 이렇게 적나?”… 그리고 녹화 날이 됐다. 이 감독을 찾는 전화가 왔다. 조용필씨였다. ‘혹시 펑크 내는 것 아냐’ 놀란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이 감독님, 오늘 나 ‘10분’ 늦어요.” 잠깐의 오차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프로 의식. 가왕(歌王) 조용필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훈아

무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스태프 한 명이 흰 티셔츠를 입고 왔다 갔다 했다. 나훈아씨가 대뜸 호통을 쳤다. “당신만 흰 옷을 입고 다니면 관객이 그쪽을 쳐다본다.” 그러곤 당장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주문했다. 이 감독은 “관객이 우선이라는 취지로 꺼낸 말”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가수며 제작진은 청중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이 감독은 다시 놀랐다. “나훈아씨가 스태프를 다 데리고 가서 식사를 대접하며 본인이 직접 격려도 하고 그랬다. 놀랐다. 스타는 그 자리를 지키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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