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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른 노래에서 임재범의 인생을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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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한 마리 짐승 같았다. 꽃미남 걸그룹이 판을 치는 와중에 임재범이란 존재는 무척 낯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게 진짜 노래’라며 열광했고 그는 ‘미친 존재감’이 됐다.
임재범의 ‘진짜 인생’이 그 너머에 있다.

취재_이한 기자 사진_중앙포토

TV를 채널을 돌리다 울면서 노래하는 남자를 봤다. 평소 마이크만 잡으면 맹수 같은 눈빛을 하고 무대 저편 어딘가를 노려보며 노래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뭔가를 잡아먹을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그의 표정은 누구보다 간절했고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다. 그가 들려준 노랫말은 이랬다.
“어디 있나요. 제 얘기 들리시나요. 그럼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은 알고 계시나요. 용서해 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은 허락해 주소서.”
임재범의 대표곡 중 하나인 ‘고해’다. 지금껏 그가 숱하게 무대에 올라 불렀던 레퍼토리지만 이날만큼은 특별했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향해 쏟아 낸 가사여서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진짜 기도처럼 들렸다. 기자가 보기에 ‘임재범 신드롬’의 출발은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나는 가수다’라는 짧고 굵은 멘트로 이슈의 중심에 섰지만, 사람들이 임재범에게 공감한 코드는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01 나는 남자다

가수 임재범 얘기를 하기에 앞서 ‘남자(또는 남편)’ 임재범 얘기를 먼저 해보자. 노래 잘하는 보컬로서의 네임 밸류야 예전부터 훌륭했지만, TV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가 10여 년 만에 방송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바로 가족들 때문이다. 노래꾼들 사이에서 그는 ‘기인’으로 통했다. 1986년 그룹 ‘시나위’의 보컬로 데뷔했을 때부터 그랬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산에 들어가 수도승처럼 살거나 방송 일정을 펑크 내고 잠적하는 일도 잦았다. 노래가 아닌 다른 요소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걸 스스로 부담스러워했고, 럭비공 같은 행보와 가끔 ‘제멋대로’인 듯 보이는 이미지가 더해져 TV에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변했다. 그 변화는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감지됐다. 임재범은 지난 2001년 뮤지컬 배우 송남영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뮤지컬 ‘하드락 카페’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다. 임재범이 당시 그 공연에 출연 중이던 가수 김원준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그날은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얼마 후 다시 만나 연애하고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10년 차. 그의 아내가 요즘 암 투병 중이다. 최근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는데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도 전이됐다는 소식이다. 병세가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은 가운데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팬들의 우려가 많다. 임재범의 매니저 김상영 이사는 “현재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고 있으며 몸 상태가 조금씩 회복되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만 언급하고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노래하는 가장’의 일상은 고단했다. 일단 가족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임재범은 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 출연해서 “지난 10년 가까이 매월 100만~200만원 정도의 저작권 수입이 벌이의 전부였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6년여 동안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무기력한 남편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고백했다. “아내의 병을 내가 키웠다”고 자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 “그녀 하나만은 허락해 주소서”라는 가사가 가슴을 동하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송남영씨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여자이다. 그와 같은 교회를 다녔던 한 신도에 따르면, 송씨는 매일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았고, 뮤지컬 배우 이력을 살려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한 자녀 가정이나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노래나 연극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암 투병만 아니었다면, 부부는 남부러울 것 없이 지냈을 터다. 임재범의 성격이 좀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아내는 예술가의 가족들이 대개 그렇듯 잘 넘겼고, 임재범 스스로도 변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헤비메탈 그룹 ‘블랙신드롬’의 보컬리스트 박영철은 “재범이 형은 가수들 사이에서도 범상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크고 작은 기행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이 되면서 생각과 행동이 전부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86년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박영철이 작년부터 올해 4월까지 임재범의 매니저로도 일했다. 박영철은 “우리나라에서 음악만으로 호의호식하며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모르긴 해도 아내분이 제법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재범이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일부나마 덜어내기 위해 선택한 게 바로 방송 출연이었다. 제작진의 삼고초려 끝에 마음을 열고 대중 앞에 섰지만, 그 이면에는 아내와 딸을 위해 스스로의 성향을 내려놓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출연한 공중파 프로그램. 첫 방송부터 소위 ‘대박’을 치면서 반전을 이끌어냈다.

02 나는 아빠다

최근 ‘나가수’에서 그의 딸 지수가 임재범에게 보낸 엽서가 공개돼 화제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일곱 줄짜리 엽서에는 받는 사람이 ‘우리 아빠’라고 써 있다. 이날 경연에 나선 임재범은 “오늘은 이게 보약”이라며 한없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기자는 거기서 잠깐 옛날 생각이 났다. 아마 2004년일 것이다. 수년 만에 앨범을 낸 임재범은 기자회견장에서 “결혼과 아이가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놨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임재범 하면 긴 머리를 흔들며 파워풀한 노래를 쏟아내는 고독한 야수 이미지로만 온전히 기억되던 때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도 평범한 가장이 된다고, 노래할 때의 에너지는 한풀 꺾인 채 요즘 말로 소위 ‘딸바보’가 된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록 스피릿’으로 충만한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그냥 ‘우리 아빠’다.

“아이 덕분에 제가 100% 바뀌었어요. 지수를 키우면서 고집도 없어지고, 무엇보다 ‘내가’ 없어졌죠. 예전 같으면 공연만 끝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을 텐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 아내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늘 열심히 일하게 되죠. 가족 구성원으로서, 집에서 내가 해야 될 역할을 분명하게 해야 되니까.”

이런 걸 책임감이라고 부를까. 나 혼자만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의 모습으로 살겠다는 분명한 다짐이었다. 스스로 옳다고 믿으면 누가 뭐래도 거침없이 행동하고, 싫으면 과감하게 No라고 외치며 자유분방하던 로커가, 이제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간절한 존재가 생긴 것.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다는 건 그런 거다. 실제로 그는 딸이 태어나고 처음 3년여 동안 거의 매일, 24시간 내내 아이와 붙어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개인기 ‘성대모사’도 하고, 가족 앞에서는 익살스러운 발레 동작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임재범은 진짜 어른이 됐다.

사람은 관습에 젖어 살다 보면 변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삶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바뀔 때가 온다. 그건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다. 요즘 그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야수 같은 로커도 사진처럼 사랑스러운 엽서를 써주는 열 살배기 아이 앞에서는 천상 딸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대한민국 행복지수』의 저자이자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 소장인 안치용씨가 경향신문에 ‘아빠 임재범 vs 가수 임재범’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임재범도 또래 남자들이 그러하듯 누군가의 아버지가 돼 있었고, 다른 중년들처럼 생활과 씨름하고 있었다”고 썼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저 노래 잘하는 가수보다 좋은 아빠인 가수가 불러주는 노래가 더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맞다. 그는 훌륭한 가수고 노래를 잘하지만, 최근 그가 불렀던 노래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있다. 요즘 그에게 열광하는 새로운 팬 중에서 유독 30대 이상 남자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03 나는 가수다

사람들은 요즘 임재범의 ‘과거’에 관심이 많다. 아버지인 임택근 전 MBC아나운서와, 배다른 형제 손지창과의 관계도 새삼 화제가 됐다. 이미 10여 년 전에 이슈가 됐던 얘기들이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는 얘기며, 아버지가 가수 활동을 반대해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스토리도 계속 회자된다. ‘언론과 대중의 집요한 관심이 싫다’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자꾸 화제가 되는 것. 결국 이런 굴곡 덕에 그의 노래가 더 깊이 다가오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그는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는 고아원에 맡겨져 자랐고, 한동안 할머니 손에서 컸다. 주민 등록증상 생일이 실제 나이와 달라서 학교도 늦게 입학했다. 보컬리스트 박영철은 “왜 그랬는지 속사정까지 자세히 얘기한 적은 없지만, 간간이 섞여 나오는 넋두리 속에 뭔가 아픔이 숨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헤비메탈 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남과 좀 다른 면이 있지만, 그 시절 재범이 형은 그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평소에는 꽤나 점잖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화가 나거나 틀어지면 야수로 변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억들이 보컬 임재범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가 됐다. ‘시나위’ 시절 그를 알았다는 한 드러머는 “심신이 편한 것보다는 차라리 약간의 고통이 있는 게 뮤지션으로서는 더 낫다”고 귀띔한다. “군대에 가도 군기 빠진 말년 고참은 의욕 상실증에 걸리기 쉽다. 뭔가 고통이 있어야 이걸 이겨야 된다는 의지도 생기고 자기 자신을 깨어나게 한다”는 얘기다. 로커들은 이런 성향을 두고 “내 삶하고 투쟁을 한다”고 얘기한다. 임재범이 최근 ‘나가수’에서 “스스로 내 몸을 괴롭히는 성격”이라고 말했는데, 결국 같은 맥락이다.

최근, 경력이 제법 오래된 가수가 기자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녹음실에 들어가면 디렉터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감정을 실어서 부르라’는 주문”이라고. 듣고 보니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도 매번 그런 얘기를 했다. 하지만 가수인 그 사람조차 “경험이 없을 때는 감정을 어떻게 실어야 되는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고, 노래 두 곡을 들려주면서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라고 해도 그냥 똑같게만 들린다”고 고백했다.

박영철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그게 바로 노래를 자기 방식대로 부르는 힘”이라고 설명해 줬다. 아무래도 나이가 좀 든, 그러니까 여러 가지 경험과 철학이 겹겹이 쌓인 가수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라는 얘기도 곁들였다.

“저도 TV에서 재범이 형이 노래하는 걸 봤어요. 아무래도 한창 젊을 때 노래하던 것과 비교하면 호흡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좀 달라진 건 사실이죠. 하지만 그 나이여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데 그게 되더라고요. 숨을 길게 끌지 않아도 충분히 감정을 실어서 부르는 거. 경험이 많은 분이어서 가능한 기술(?) 같아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스무 살 때는 자기가 어른인 줄 알지만, 서른 돼서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서른도 마흔에 돌아보면 아직 철없다고 느끼죠. 가수는 특히 더 그래요. 적어도 마흔, 그 이상은 지나야 깊은 노래가 나오죠.”

이건 단순한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굴곡을 겪어낸 사람이 내는 향기는 그렇지 못한 사람과 그 깊이 차이가 확연하다. 연륜이 쌓였다는 것. 그런 지점에서 판단이 가능하다. 물론 임재범의 인기는 ‘과거’에서만 기인한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노래’의 진정성에 매력이 있다. ‘나가수’의 연출을 맡은 신정수 PD는 ‘진짜 노래’라는 말로 해석을 달아줬다.

“어렵게, 순수하게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랐던 예전 세대들이 이제 어른이 돼서 문화를 소비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진짜 노래’들이 주목받는 시대가 왔어요.” 신정수 PD는 ‘놀러와’ 시절 세시봉 특집을 기획해 대히트를 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세시봉과 임재범. 둘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진심에 가까운 노래로 주목을 받았다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아버지 임택근 전 아나운서는 지금…

임재범이 화제가 되면서 그의 아버지 임택근 전 아나운서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몇 년 전까지 악기사를 운영하고 은퇴한 아나운서들의 모임을 이끌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최근에는 직함을 모두 내려놨다.

임택근씨에게 최근 임재범의 근황과 소감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이제 쉰 살이 다 된 어른인데 내가 굳이 나서서 그 아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건 조심스럽다”며 거리를 뒀다. 최근 몇 년 동안 따로 만난 적이 없었고 비교적 소원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난 2001년, 임재범의 결혼을 앞두고 손지창과 오연수의 중재로 임택근이 배다른 두 아들과 만났던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오랜 갈등과 오해는 풀었지만 아쉽게도 좀 더 돈독한 관계 회복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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