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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카드를 아끼는 지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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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호 35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에 있던 지난주 서울과 도쿄의 외교가에선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무토 마사토시 주한 일본대사가 박석환 외교1차관을 방문한 데 이어 귀국 날짜를 받아둔 권철현 주일대사가 마쓰모토 다케아키 외상에게 불려갔다. 외교용어로 초치(招致)라고 하는 고강도 항의 수단이다. 강창일 국회 독도특위위원장 등 민주당 국회의원 세 명이 쿠릴 열도를 방문한 데 대한 항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 분쟁 중인 지역에 러시아 정부의 허가만 받고 들어간 것은 일본의 주권을 무시한 행위란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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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의원 일행은 “러시아가 영유권 분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갔다”며 “국회 독도특위 활동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쿠릴 열도의 영유권 분쟁이 독도와 비슷한 측면이 있으니 러시아의 전략을 벤치마킹할 수 있지 않으냐는 논리다. 이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쿠릴 열도를 전격 방문한 사실을 염두에 둔 주장이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변인은 26일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쿠릴 열도를 방문했는데 우리 대통령은 왜 독도에 방문하지 않는지 국민은 의문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 3월 일본의 교과서 발표 이후 여권과 정부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카드를 검토한 적이 있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런 논리엔 큰 함정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와 쿠릴 열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분쟁 지역’이냐 아니냐에 있다. 쿠릴 열도는 당사자들도 인정하는 분쟁지역이다. 1955년 소련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발표한 공동선언에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면 (4개 섬 가운데) 두 섬은 일본에 반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93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호소카와 일본 총리가 발표한 공동선언에도 “4개 섬의 귀속 문제를 해결한 뒤 평화조약을 체결한다”고 되어 있다. 다만 양국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해 협상이 시작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반면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다. “영유권 귀속이 너무 명백해 아무런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이다.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정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당사자 간 협상이든, 국제사회의 중재든,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제소를 통해서건 분쟁을 해결하라는 압박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일본의 일차적인 목표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좋은 수단은 국제사회의 여론이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 이는 바로 ‘울고 싶은 아이에게 뺨 때리는 격’이 될 것이다. 일본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도발을 해 올 것이고 한국의 대응책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국제사회의 눈에는 분쟁지역으로 비춰질 수 있다. 만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ICJ에서 해결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한다면, 한국은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쿠릴식 해법이 독도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법이나 시기 선택이 잘못된 대응책은 일본의 덫에 걸려드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둬야 할 히든 카드다. 그래야 효력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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